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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0020
한자 大邱, 近代 啓蒙運動― 敎育都市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정의]

근대 계몽운동 시기의 교육도시 대구.

[대구는 근대 교육의 요람]

근대 계몽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영역이 바로 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 운동이었다. 근대 계몽운동 시기는 ‘학교 설립의 시대’로 불렸다. 대구에서도 계몽운동 시기에는 근대 교육을 위한 학교 설립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져, 계몽운동 시기를 전후하여 교육 방식이 완전히 바뀐다. 이를테면 ‘서당’에서 ‘학교’로 변화되었다. 계몽운동 시기에 대구의 근대 교육기관 설립은 대한제국 정부와 계몽운동 단체 및 신지식층의 협력으로 이루어졌다. 또 천주교 및 개신교도 학교를 설립하였다.

[대한제국과 경상도 관찰사의 교육 방침]

1906년 경상북도관찰사로 재임하던 이근호(李根澔)대구 광문사(大邱廣文社)의 김호규(金濩圭) 등의 건의에 따라 학교 설립을 추진하려 하였으나 1906년 2월에 자리를 옮기면서 결실을 얻지 못하였다. 김호규의 건의는 1906년 2월에 ‘교육이 급선무’라는 인식에서 관찰사 이근호에게 관찰부 속의 낙육재(樂育齋)양사재(養士齋)를 사립보통학교로 설립하자고 하는 청원이었다. 1906년 3월 경상북도관찰사로 부임한 신태휴(申泰休)도 학교 설립에 관하여 ‘흥학훈령(興學訓令)’을 발포하였다. 흥학훈령의 내용은 ‘각 군 100호마다 학교 설립, 학교 경비는 100호가 매월 각 1냥 5전씩 학교에 납부할 것, 학교 교과과정은 군수와 교사가 상의하여 정할 것, 학생 기강·교사 선정·학생 모집·교비 수납은 통장이 군수의 지휘·감독을 받아 거행, 학생 연령은 8세부터 30세까지로 할 것’ 등이었다. 그즈음 고종 황제의 ‘흥학조칙(興學詔勅)’이 내려졌다. 내용은 ‘오늘의 급무는 학교를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는 것’에 있다고 하면서, 학부와 관찰사가 널리 학교를 설립할 방도를 모색하라는 것이었다. 이어 고종 황제는 경상북도에 특별히 1,000원의 하사금을 지급하였다. 김진수 등은 흥학조칙과 하사금을 가지고 대구로 내려왔다.

1906년 4월에 대구 광문사는 총회를 열고, 흥학조칙을 봉독하고 학교 설립 방안을 강구하였다. 그리고 관찰사와 학교 총무 김진수·김호규 등은 흥학조칙을 들고 각 군을 순행하며 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또 관찰사 신태휴는 학교 설립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김광제(金光濟)를 각 군에 파견하였다. 그즈음 학교 설립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자 필요한 교사를 양성하기 위하여 서상돈·김윤란·정재학·정규옥 등 20명이 발기인이 되어 각 500원의 특별의연금을 기부하였고, 관덕정(觀德亭)[관덕당(觀德堂)]을 수리하여 사범학교를 설립하였다.

[계몽운동기 대구의 근대 학교 현황]

경북관찰사 신태휴대구 광문사, 지역 유생과 유지들의 노력에 힘입어 1906년 10월에 신태휴가 자리를 옮길 때까지 대구를 포함하여 경북 41개 군에 370여 개의 학교가 세워지고, 4,500명의 학생이 신교육의 혜택을 받았다. 이때 대구의 학생 수가 470명에 이르렀다. 또 신태휴에 이어 경상북도관찰사로 부임한 이충구(李忠求)도 학교 설립와 운영에 적극적이었다. 1910년 10월 이전까지 대구에 설립된 근대 교육기관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달성학교(達城學校)[사립, 1899], 달동심상소학교(達東尋常小學校)[사립, 1903], 달동의숙(達東義塾)[사립, 1904], 시무학당(時務學堂)[사립, 1905], 계남학교(桂南學校)[사립, 1906], 달명의숙(達明義塾)[사립, 1906], 양성학교(養成學校)[사립, 1906], 일신학교(日新學校)[사립, 1907], 양성여학교(養成女學校)[사립, 1907], 수창학교(壽昌學校)[사립, 1907], 협성학교(協成學校)[공립, 1907], 국문야학교(國文夜學校)[사립, 1908], 달서여학교(達西女學校)[사립, 1909], 인수학교(仁壽學校)[사립, 1910(설립인가),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사립, 1910(설립인가)], 달남학교(達南學校)[사립, 1910(설립인가)], 흥화학교(興化學校)[사립, 1910(설립인가)], 계성소학교(繼聖小學校)[사립, 1910(설립인가)], 경북실업보습학교(慶北實業補習學校)[사립, 1910].

[근대 학교의 설립 주체와 재정 운영]

근대 계몽운동 시기에 대구 지역의 근대 학교 설립 주체는 누구이며 재정은 어떻게 확보하였을까? 대구는 경북관찰사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과 학부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이 학교 설립을 정책적으로 뒷받침하고 있었다. 경상북도관찰사의 경우 이근호, 신태휴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대구 광문사대구광학회, 대한협회 대구지회, 교육부인회 등과 같은 계몽운동 단체를 들 수 있다. 대구 광문사에서는 김호규, 김광제 등을 위시하여 서상돈(徐相燉), 정재학(鄭在學) 등 다수의 회원이 학교 설립에 참여하였고, 대구광학회에서는 이일우, 최대림, 이영면 등을 위시하여 다수의 회원이 참여하였다. 실제로 대구 광문사대구광학회는 모두 ‘흥학설교’와 ‘식산흥업’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학교 설립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또 이를 위하여 민회 형태의 대구민의소와 대구시의소를 운영하였다. 그 밖에도 문중이나 신진 유학자들이 신학문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설립한 경우도 없지 않다.

근대 교육기관의 재정은 어떻게 마련되었을까? 여기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정부의 하사금, 설립된 학교 인근의 정기 갹출, 자산가들의 기부 등이 있을 수 있다. 무엇보다 신태휴의 흥학훈령에서와 같이 향교 재산을 전용할 수 있게끔 하였다. 그에 따라 대구의 향토 재산이나 낙육재, 양사재와 같은 기존의 교육 관련 시설과 기금으로 충당하는 일이 많았다. 예를 들어 달성학교가 1906년 협성학교로 변경될 때, 대구향교 관할 아래 있던 낙육재양사재의 재산이 협성학교의 재정 기반이 되었다. 또 신태휴의 흥학훈령에서와 같이 100호 기준으로 학교를 설립하면, 100호가 일정 금액을 학교 운영비로 내도록 하는 방법이 있었다. 학교가 있는 지역의 사람들이 학교 운영비를 내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런 방법은 민중에게는 군수의 가렴주구가 될 수 있었다.

[근대 학교 교육론과 이념]

근대 계몽운동 시기의 교육 이념은 어디에 중점이 두어졌을까? 관찰사 이근호는 신학문에 대하여 “신학문이 별것이 아니고 효제충신, 격치, 치평, 일용당행(日用當行)의 도(道)일 뿐이고, 작고참금(酌古參今), 온고지신하는 것이다”라고 규정하였다. 이처럼 이근호는 신학문의 기본을 전통 또는 구학에서 찾았다. 이근호에 이은 관찰사 신태휴는 흥학훈령을 통하여 밝힌 교육론에서 “구학문을 근본으로 하고 새로운 서양의 학문을 익힌다”라고 하여 학부의 교육 방침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대구 광문사의 사장 김광제는 찬술원 교과서 편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혔다. “당시 학교에서 지·덕·체 3과로 나누어진 교과 가운데 신학문은 덕육 부문에서 결함이 있으므로 본사 찬술원은 사서의 심성정과 인의예지 등 어구 가운데 요긴하고 심오한 글의 뜻을 가려내어 신학문 덕육과에 참고하여 중등사회나 고등 학도를 교육함이 시의에 가장 적합하다.” 이처럼 근대 교육론은 덕육 부문에서 전통을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전통 또는 구학에 신학문을 연계하는 ‘신구학 절충론’이 제시되었다.

신구학 절충론은 대구 수창학교의 설립 취지에 적절히 드러나고 있다. 수창학교의 입학 기준에 15세 이하의 학생은 한문을 수학하고, 15세 이상의 학생은 외국인 신학 교사들에게서 어학과 같은 신학을 익히도록 하였다.

이렇듯 신구학 절충론의 교육론과 교육 이념을 내세우면서도 ‘개명’에 중심을 두었다. 시무학당에서는 ‘대한 국민의 지식을 개발·증진’하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 협성학교에서는 ‘유신사상과 공익주의’를 설립 취지로 설명하면서 “교과 정도는 문자와 언어로 세계와 소통하고, 나라 간의 교류하는 법률에 통달하며, 공업·상업·기술·수학 등 생활에 도움이 되고, 시무에 통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 밖에 대구의 경우는 아니어도 ‘국혼’, ‘국권’ 등을 학교 설립의 교육 이념으로 제시하는 사례도 있다.

[근대 학교 운영의 사례]

대구의 대표적 근대 사립학교인 수창학교협성학교를 통하여 학교가 운영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수창학교는 1907년 7월 경북 관찰부의 사과(司果), 감찰(監察), 주사(主事) 등 전직 하위 관료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근대적 초등학교였다. 수창학교의 학교 운영은 1908년에 설립된 대한협회 대구지회의 지원을 받으면서 이루어졌다. 수창학교의 교과목, 학사 행정, 학교 재정 등 학교 운영 상황이 대한협회 대구지회에 보고되었다. 이처럼 수창학교대한협회 대구지회의 지원과 협조 속에 운영되고 있었다. 협성학교는 서상하를 교장으로 한 근대 중등 교육기관이었다. 협성학교는 학교 운영에 관련된 학교의 임원 개선, 교과목 선정, 학사 행정 등에 대하여서는 대한협회 대구지회와 협의하여 운영하였다.

사립 달서여학교교육부인회의 기부금에 상당히 의존하였다. 명신여학교는 1910년에 설립되었는데, 1909년 1월에 대구를 방문한 대한제국 황제의 은사금이 계기가 되어 설립되었다. 명신여학교는 명실상부한 대구의 대표적 여성 교육기관으로서 관심을 받았다. 명신여학교의 재정은 대구의 유지들이 낸 기부금과 대한협회 대구지회의 해산 후 남은 돈의 이자로 마련되었다. 즉 명신여학교의 경우 설립 이후에는 대구 유지의 기부금이 운영의 주요 원천이었다. 이처럼 근대 계몽운동 시기 대구의 학교는 정부, 경북 관찰부, 계몽운동 단체, 지역 유지 등의 연대로 설립되고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다.

[근대 학교 교과과정과 교과목]

계몽운동 시기 근대 학교의 교과과정과 교과목은 어떻게 편성되었을까? 대구 최초의 사립학교인 달성학교의 경우 심상과와 고등과로 나누어 운영하였고, 여기에 일어 전수의 교과과정을 두었다. 교과목은 학년마다 다소의 차이가 있으나 심상과는 독서·일어·역사·지리·작문·습자·수신·산술·체조 등으로 구성되었고, 고등과는 여기에 수신·이과·화학·부기·도화[미술] 등이 추가되었다. 달성학교협성학교로 전환된 뒤 협성학교는 심상과와 고등과로 운영되었다. 심상과는 윤리·독서·작문·역사·지리·산술·경제·박물·물리·화학·도서·외국어·체조 등의 교과로 구성하였다. 고등과는 정치·법률·독서·산술·경제·박물·물리·화학·외국어·공업·농업·상업·의학·측량·체조 등으로 구성하였다.

[서양 종교 기관이 설립한 근대 학교]

대구에는 일찍부터 서양 종교가 전래되었다. 물론, 천주교 박해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근대 계몽운동기에 천주교의 대표적 교육기관은 1908년 1월에 프랑스 신부 김보록이 설립한 성립학교(成立學校)이다. 한국인 김찬수가 학감을 맡았다. 성립학교는 1913년 또는 1915년에 해성학교(海星學校)로 개명하였다. 개신교에서는 1902년 미국 장로교 선교회가 대남남자소학교(大南男子小學校)를, 그 후 신명여자소학교(信明女子小學校) 등을 설립하였다. 또 중등학교로 1906년에 계성학교를, 1907년에 신명여학교를 설립하였다.

[역사적 의의]

근대 계몽운동 시기에 대구는 교육도시였다. 경북 관찰부와 대구의 계몽운동 단체, 대구의 개명한 유지 등의 연대와 노력으로 많은 학교가 설립되어 근대 사상을 널리 알리고, 근대를 담당할 청년 지식층의 양성에 기여하였다. 근대 학교를 통하여 배출된 인력은 사회에서 각자의 역할을 맡으면서도 ‘한일병합’ 이후 식민지 민족운동의 주요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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