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사범학교 문예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288
한자 大邱師範學校 文藝部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40년 11월 23일연표보기 - 대구사범학교 문예부 결성
설립 시기/일시 1941년연표보기 - 대구사범학교 연구부 결성
개칭 시기/일시 1941년 2월 중순 - 대구사범학교 문예부 대구사범학교 연구부와 대구사범학교 다혁당으로 확대 개편
해체 시기/일시 1941년 7월 말 - 대구사범학교 문예부 대구사범학교 다혁당 와해
성격 비밀결사
설립자 대구사범학교 학생

[정의]

1940년 11월 대구광역시에서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결성한 비밀 결사.

[개설]

대구사범학교 문예부(大邱師範學校文藝部)는 1937년 7월 경부선 복선화 공사에 동원된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일본인 교사의 차별에 항거한 ‘왜관사건’을 계기로 결성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한 비밀결사였다. 왜관사건은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에게 민족문제를 각인시키는 한편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대구사범학교 문예부는 왜관사건 직후 학교 내에서 각 학년별로 비밀리에 조선 역사서와 문예 작품을 읽고 토론한 윤독회가 배경이 되었다. 윤독회는 1940년 1월 비밀리에 민족의식이 담긴 한글 문예지 『반딧불』을 발행하였다.

[설립 목적]

대구사범학교 문예부는 일제의 전시 동원 체제 하에서 민족의식을 앙양하고 학술 연구의 역량을 강화하여 조국의 독립에 이바지할 목적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변천]

1940년 11월 23일 결성된 대구사범학교 문예부는 1941년 결성한 대구사범학교 연구부[대구사범학교 연구회]와 1941년 2월 중순 대구사범학교 다혁당(茶革黨)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대구사범학교 다혁당은 일제의 탄압을 받아 1941년 7월 말 와해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40년 11월 23일 이태길의 하숙집에서 강두안·박찬웅·박효준 등 심상과(尋常科) 5학년에 재학 중이던 대구사범학교 8기생이 9기생 류홍수·문홍의·이동우 등과 10기생 김근배 등 윤독회 회원들을 규합하여 일제 식민지로부터 벗어나 독립할 것을 목표로 하는 대구사범학교 문예부를 결성하였다. 대구사범학교 문예부는 비밀 엄수를 약속한 가운데 매주 토요일 우리글과 말을 익히는 한편 기관지 『학생』을 발행하였다. 또한 조선의 역사와 문화, 정세에 관하여 의견을 발표하고 서로 토론하는 활동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앙양하였다.

1941년 다가올 독립에 대비할 목적으로 학문 분야를 연구하여 실력을 양성하는 또 하나의 비밀결사인 대구사범학교 연구부를 조직하였다. 이후 학생들이 졸업함에 따라 1941년 2월 대구사범학교 문예부와 대구사범학교 연구부를 확대·개편한 대구사범학교 다혁당을 결성하였다. 1941년 7월 말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충청남도 홍성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정현(鄭鉉)이 가지고 있던 『반딧불』이 일제 관헌에 발각되면서 대구사범학교 다혁당의 실체가 발각되었다. 결국 대구사범학교 다혁당은 결성된 지 5개월여 만에 와해되고 말았고 대구사범학교 다혁당 당원을 포함한 300명이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1943년 2월 예심을 거쳐 1943년 12월 최종 판결에서 35명이 징역 5년에서 2년 6월까지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가운데 서진구는 광복을 맞이하지 못하고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의의와 평가]

대구사범학교 문예부는 항일운동이 침체되었던 시기에 결성되어 민족의식을 앙양한 1940년대 항일 학생운동의 대표적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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