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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20939
한자 改新敎[東區]
영어공식명칭 Protestantism
이칭/별칭 기독교,교회,기독교대한감리회,대구제일교회,한국기독교 선교침례연합회,성신교회,대구동흥교회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신우

[정의]

근·현대시기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 일대에 활동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한 분파.

[개설]

개신교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분리된 복음주의 성향의 기독교 교파들을 두루 일컫는 말이다. 개신교의 주요 교리는 서기 1세기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이 『신약 성경』을 구성하는 복음서 네 권과 서간[바울과 그 제자들이 각 교회 공동체로 보낸 편지] 속에 기록한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다. 개신교인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사흘 뒤에 부활해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에 대단히 큰 의미를 둔다. 예수가 고통 속에서 숨을 거둔 뒤 땅속에 묻혔다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내리기 위해 죽음에서 부활했으며, 40일 동안 지상에 머무르다가 승천해 아버지인 하나님 옆에서 인간 세상을 다스린다는 내용은 기독교의 중심을 이루는 믿음이다.

[우리나라 개신교 역사]

개신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전래된 것은 1832년(순조 32) 7월 만주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전도하려던 독일인 칼 귀츨라프[K. E. A Gutzlaff]에 의해서였다. 칼 귀츨라프는 서해안에 상륙하여 약 1개월간 체류하면서 외교 관계와 선교 사업을 위해 정식으로 입국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 우리나라에서 개신교 선교가 정식으로 시작된 시기는 1882년 슈펠트 조약 이후부터라 할 수 있다. 1884년 6월 미국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R. S. Mclay]가 한국에서 선교를 요청하여 7월 3일부터 황제의 허락을 얻어내기에 이르렀으며, 1885년 미국 선교사들이 입국함으로써 한국 선교의 꿈이 실현되기 시작하였다.

[주요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선교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은 상황에서 개신교는 큰 발전을 하지는 못하였다. 1887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을 통해 선교 활동이 가능해지자 선교사들은 지방 선교 여행을 시도하였다. 개신교 선교사는 이미 한국 사회에 전래되어 있던 천주교와 경쟁을 고려해야 했고, 아울러 과거 천주교의 직접 선교 정책이 국가와 갈등을 빚었다는 점을 고려해 선교 활동을 의료와 교육 활동을 통한 간접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런 가운데 1890년 중국 산동성 주재 미국 북 장로교회 선교사 네비어스가 조선을 방문하여 선교 정책을 체계화하였다. 네비어스의 선교 방법은 종래 토착 교회의 성장을 위해 본국의 선교 기금을 사용하는 방법에서 본토 교인들 스스로가 비용을 부담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네비어스는 선교지에서 선교 착수, 새 신자 관리, 신앙 공동체 관리, 교인 훈련과 교육, 사경회 교회 조직 등 광범위한 문제를 세밀하게 다루었다. 이른바 네이버스 선교 정책은 ‘자전, 자급, 자치’를 기본으로 독립적이고 자립적이며 진취적인 토착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었다. 네이버스 선교 정책은 선교회 공의회의 10가지 선교 규칙으로 확대되었다.

한편,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교파 중심 개신교가 수용되어 전해지는 과정에서 각 교파 간 이른바 ‘교계예양’이라고 불리는 선교지 분할 협정이 맺어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경상북도는 미국 북 장로교의 주요 선교 대상이 되었다. 개신교가 들어온 후 조선은 일제에 의해 강점당하였다. 일제는 국교인 신도(神道)를 식민지의 종교로 받아들이기를 강요함으로써 개신교도 수난을 당하게 되었다. 특히 근대화의 강한 추진력이 되었던 개신교는 일제의 탄압 대상이 되었다. 일제는 교회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제거하여 독립정신의 온상이 된 교회를 말살하려는 일제의 음모사건이었다.

일제하에서 교회가 겪은 또 하나의 사건은 신사참배 문제였다. 일제는 1930년부터 기독교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강요하였다. 1935년부터 외국 선교사들에게도 강요하였으며, 이를 거부한 교직자들과 신도들을 탄압하였다. 그 결과 2,000여 명 교회지도자가 투옥되었다. 그러던 중 1945년 광복과 함께 교회는 다시 신앙의 자유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인해 교회는 다시 쑥밭이 되고 말았다. 지도자의 과반수를 잃게 되었고, 교회의 대부분이 소실 또는 파괴 등 치명상을 입었다. 1953년 휴전과 함께 교회는 재건되기 시작했는데, 그 후 10년 사이에 놀라울 정도로 교회는 부흥하였다.

1960년대 개신교는 중흥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는 약 25개의 새 교단과 100여 개의 새로운 기관이나 단체가 생겼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개신교는 선교 100주년을 맞을 준비를 하며 세계에 공헌하는 교회로 비약할 전략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활발했다. 1980년대 교회는 급격히 성장하여 1980년대 말에는 교단 수도 1백 개를 넘어서고 교인 수도 1천만 명을 넘어섰다. 각 교단은 교단분립에 그치지 않고 자기교단의 신학교를 세움으로써 신학교의 수도 급격하게 증가하여 전국신학대학협의회[KAATS]에 가입한 신학교만도 30여 개에 이르게 되었다.

1897년 11월 대구[대구광역시]로 부임해 온 아담스 선교사에 의해 비로소 대구·경북 지역 최초 교회가 모습을 갖추어 가게 되었다. 처음 교회 이름은 대구읍교회, 성내교회, 남문내교회[현 제일교회]로 불리었다. 바로 교회 앞 도로에 있었던 대구읍성 때문에 붙여진 이름들이었다. 그리고 1897년 성탄절에 장의사로 의료 선교사 존슨[Dr. W. O. Johnson]과 부인[Edith Parker]이 함께 대구로 와서 아담스 가족과 합류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899년 5월 1일에 선교사 브루엔[Hernry Munro Bruen]이 대구 선교사로 임명받았다. 대구는 공식적인 선교 지부가 되었다. 그리고 1899년 11월에는 선교사 사이드보담[Sidebotham] 부부가 대구로 와서 선교 활동에 합류하였다. 그 결과 대구선교지부가 1899년 공식적으로 개설되어 본격적인 전도 활동을 하였다.

아담스 선교사와 함께 활발한 활동을 한 선교사는 브루엔[부해리] 선교사와 그의 부인[부마태]이었다. 브루엔 선교사는 아담스 선교사의 후임으로 활동하였고 부인인 부마태는 신명여자소학교와 신명학교를 설립하였다. 브루엔 선교사는 1899년부터 1941년까지 42년간 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였다. 아담스 선교사는 경상북도 동쪽 지방을 맡아 활동하였고 브루엔 선교사는 김기원, 김영채, 이희봉, 김호준 조사와 함께 경상북도 서북부 지역을 담당하였다.

그 외에 당시 경상북도 지역의 선교 활동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 기관 가운데 동산병원 전도회가 있다. 동산병원 2대 원장으로 취임한 플래쳐[Dr. A.G. Fletcher]는 경상북도 지역의 전도를 위해 전도회를 조직하였다. 전도회에는 병원 직원 전체가 참여하였으며 초대 회장에 플래쳐 원장, 부회장에 김재명 등이 일을 맡아 보았다. 전도회에는 박덕일 목사를 비롯하여 김충한, 정재문, 김원휘, 강신창 등 목사들과 허일 장로 등이 중심이 되어 전도와 교회 설립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구 및 동구 지역 개신교 역사]

대구광역시에서는 1893년 장로교 선교사인 베어드가 대구를 방문하면서 기독교 전래가 시작되었다. 1893년 4월 22일 팔조령을 넘어 대구로 들어온 베어드 선교사는 3일간 대구 방문을 통해 많은 서적을 배포하는 활동을 하였다. 당시 대구가 인구가 많고 경상도 교통의 요충지임을 파악한 베어드는 선교 기지로 대구를 주목하게 된다. 이후 1896년 1월 베어드는 대구를 방문하여 남문 안의 정완식의 집을 구입하여 수리한 후 4월 가족과 함께 이사 왔다. 그러나 1896년 10월 베어드 목사는 서울 지역 교육 담당 고문이 되어 대구를 떠나게 되었고, 대구의 선교는 처남인 아담스[Rev. James. E Adams] 선교사가 대신 맡게 되었다. 남문내교회는 아담스 선교사, 제중원을 세운 존슨 의사, 여러 교인의 활동과 더불어 규모가 점차 확대되었다. 1907년경의 통계를 보면, 교인이 800명 정도로 급증하였다. 이로 인해 보다 넓은 본당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1907년 이근배, 이영민, 정인구 등 교인을 중심으로 건축 위원을 조직하고 성도들의 헌금을 기반으로 1908년 두 번째의 교회 본당을 완공하였다.

현재 대구광역시 동구에서는 아담스 선교사가 세운 반야월 교회를 비롯해서 효목교회와 불로교회 등 100주년 이상 역사를 가진 교회들이 생겨나고 있다.

[동구 지역 감리교회]

기독교대한감리회의 자료에 따르면, 2017년 현재 대구광역시 동구에 있는 감리교회는 대구제일교회, 동대구교회, 드림교회, 밀알교회, 생명의 교회, 은평교회 등이다. 감리교회는 1948년 대구제일교회가 가장 먼저 대구광역시 동구 신천동에 세워졌으며, 그 이후 약 20여 년간 감리교회는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에 설립되지 않았다. 1970년대에 가면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에 동대구교회[1971], 대구광역시 동구 불로동에 은평교회[1977]에 세워지면서, 감리교회 교세가 확장되었다. 그 이후 1987년 대구광역시 동구 율하동밀알교회, 2006년 대구광역시 동구 신기동에 생명의 교회, 2012년 대구광역시 동구 각산동드림교회가 만들어졌다. 대구광역시 동구 율하동에 세워졌던 고산제일교회는 2017년 현재 대구광역시 수성구 고산동에 소속되어 있다.

[대한기독교장로회]

대한기독교장로회 대구노회 소속 교회는 동흥교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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