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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동구]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20299
한자 壬辰倭亂[東區]
영어공식명칭 Japanese Invasions of Korea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구본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92년 - 임진왜란 발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98년 - 임진왜란 종전
임진왜란 - 조선

[정의]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간 조선에 쳐들어온 일본과 싸운 전쟁 가운데 대구광역시 동구 일대에서 치뤄진 전쟁.

[전개과정]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일본군[왜적(倭賊)]이 1592년(선조 25) 5월 23일에 대규모 병력으로 부산포(釜山浦)[지금 부산광역시]에 진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부산성과 동래성을 함락하고 북상하였다. 선조는 1592년 6월 9일에 한양[지금 서울특별시]을 떠나 평양으로 피난을 갔고, 일본군은 1592년 6월 12일에 한양을 점령하였다. 조선군은 1592년 6월 16일에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옥포해전에서 전승을 거두어 일본군의 전라도 진입을 저지하였다. 또한 곽재우(郭再祐)를 비롯한 의병(義兵)들이 일어나 각지에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일본군은 1592년 7월 21에 평양성을 점령하였으며, 8월에는 두만강 지역까지 도달하였다.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구원군(救援軍)을 요청하였으며, 1593년 1월에는 명군(明軍)의 지원으로 평양성을 탈환하고 4월에 이르러 일본군이 한양에서 철수하였다.

1592년 7월에는 권응수(權應銖)가 이끄는 의병들이 영천성[지금 경상북도 영천시]을 탈환하여 적의 후방 보급로를 차단하는 등 일본군의 전세(戰勢)를 약화시켰다. 육상에서는 권율(權慄) 장군이 이끄는 관군(官軍)과 바다에서는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수군(水軍)이 크게 활약하였다. 이후 강화회담이 진행되었으며 1594년에서 1596년까지는 전쟁이 소강상태가 되었다.

1597년(선조 30) 1월에 일본군은 재침을 하였는데 이를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한다. 일본군은 경기도 죽산까지 나아갔으나 패퇴(敗退)하여 울산의 도산성(島山城) 서생포(西生浦) 지역으로 물러나 진지를 구축하고 조·명(朝明) 연합군에 저항하였다. 1598년(선조 31) 8월에 전쟁을 일으킨 풍신수길(豐臣秀吉)이 병사하자 12월에 철군하여 전쟁이 종결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지킨 의병, 공산의진군]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8일 만인 1592년 5월 30일에 일본군은 대구의 남쪽 팔조령을 넘어 파동(巴洞)[지금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을 거쳐 대구부(大邱府)[지금 대구광역시] 내(內)로 진입하였다. 졸지에 변란을 당하자 대구지역의 유림(儒林) 지도자와 백성들은 팔공산과 비슬산 등지로 피난을 하였다. 대구부사 윤현(尹晛)은 군사를 이끌고 울산의 좌병영(左兵營)으로 가다가 길이 막혀 다시 돌아와 팔공산 동화사(桐華寺)로 들어가 관군을 지휘하였다.

1592년 8월 12일에 이르러 대구지역 유림들은 대구광역시 동구에 있는 부인사(夫仁寺)에서 향회(鄕會)[유림총회]를 열어 대구지역을 20개 지역으로 분할하여, 즉 읍내(邑內) 7개 리(里), 해안현 5개면(面), 하빈현 4개 면(面), 수성현 4개 면(面)으로 분할하여 의병을 조직하였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연경서원에서 함께 공부한 동학(同學)들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이를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이라 하였다. 공산의진군은 당시 대구지역 유림의 종장(宗長)이자 원로인 임하(林下) 정사철(鄭師哲)[1530~1593]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정사철이 다리에 난 종기로 인하여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자,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1550~1615]이 대장을 맡게 되었다. 서사원은 「초집향병통문(招集鄕兵通文)」과 「향병입약(鄕兵立約)」을 몸소 작성하였다. 그러나 서사원은 승중손(承重孫)[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대신해 제사를 받드는 맏손자]으로 조모상을 당하게 되자,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1553~1634]이 승계하였으며, 손처눌이 부모상을 당하자 태암(苔巖) 이주(李輈)[1566~1604]가 승계하였다.

1596년(선조 29)에는 팔공산에서 두 차례 회맹이 있었는데 이는 왜적의 재침에 대비한 것이었다. 제1차 회맹은 1596년 4월 2일에 있었는데 70개 읍(邑) 485명이, 제2차 회맹은 11월 18일에 16개 읍(邑) 105명의 의병장이 참여하였다.

공산의진군은 대구광역시 동구에 있는 동화사의 관군과 유기적인 연락을 취하면서 여러 지역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하였다. 대구지역은 일본군이 북상하는 주요통로로 점령 후 후방기지로 일본군을 주둔시켰던 관계로 다른 지역에 비하여 의병의 조직은 늦었으나 공산성(公山城)을 근거지로 조직적으로 전투를 하면서 지역의 주민을 보호하고 일본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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