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6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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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丁巳擬上疏 |
영어공식명칭 | To Quit An Submit A Written Opinion In Jungsa Year[1617] |
이칭/별칭 | 「정사년에 상소하려다 그만두다」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곽명재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43년 - 「정사의상소」 저자 정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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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617년![]()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20년 - 「정사의상소」 저자 정구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680년 - 『한강집』에 「정사의상소」 수록하여 간행 |
배경 지역 | 사수동 -
대구광역시 북구 사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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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지역 | 도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서원로 1[도동리 35]![]() |
성격 | 주의류|소문 |
작가 | 정구 |
조선 후기 대구 일대에서 강학 활동을 하였던 문신이자 학자인 정구가 1617년에 상소하기 위하여 지은 소문.
「정사의상소(丁巳擬上疏)」의 저자 정구(鄭逑)[1543~1620]의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도가(道可)이며, 호는 한강(寒岡)이다. 아버지는 정사중(鄭思中)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 이환(李煥)의 딸이다. 이황(李滉)[1501~1570]과 조식(曺植)[1501~1572]의 문인이다. 모든 방면의 학문에 정통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어 많은 예서(禮書)를 편찬하였다. 정구는 말년에 칠곡 사수(泗水)[현 대구광역시 북구 사수동과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일대]로 이거(移居)하여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대구를 포함한 인근 지역의 유학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도동서원(道東書院) 등 많은 서원에 제향되었다.
「정사의상소」는 1617년 11월에 인목대비(仁穆大妃)[1584~1632] 폐위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하여 쓴 소문(疏文)이다. 『국역 한강집』에 수록된 「정사의상소」의 이칭은 「정사년에 상소하려다 그만두다」이다.
「정사의상소」는 서두에 상소를 올리는 이유를 말하고, 여러 단락을 통하여서 인목대비 폐위의 부당함을 제시하고 있다.
「정사의상소」는 인목대비 폐위에 대한 부당함을 호소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지난 역사를 두루 살펴보아도 자식이 어미를 폐위하는 사례는 찾아 볼 수 없다.
2. 순(舜) 임금도 자신을 죽이려 한 아비를 내치지 않고 자식된 직분을 다하였으며, 주희(朱熹)[1130~1200]는 당나라의 무조(武曌)[624~705]와 송나라 때 장식(張栻)[1133~1180]의 경우에서도 그 부모를 내쫓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3. 주변의 이야기들을 정밀하게 살펴 올바르게 가려냄으로써 정론을 바로 세우고 임금의 효성을 다하여 사표가 되어야 한다.
4. 중국에 품의(稟議)하는 절차에서 문제가 생긴다.
「정사의상소」는 실제 상소로는 올리지 않은 글이다. 정구는 광해군(光海君)[1575~1641]이 유약(柳瀹)[1580~1623]의 상소에 비답하는 것을 보고 더 이상 말릴 수 없음을 알고 상소하지 않았다.
「정사의상소」는 1608년(선조 41) 정사년에 임해군(臨海君)[1574~1609]을 용서하여 달라는 차자와 1613년(광해 5) 영창대군(永昌大君)[1606~1614]을 살려 달라는 차자에 이어 인목대비 폐위를 막기 위하여 올리려던 상소였다. 『한강집』의 연보를 보면 「정사의상소」는 바로 불태워졌다고 하나 후인들이 거두어 문집을 간행하면서 수록한 것이다. 정구의 충성심과 간곡한 문학적 표현이 두드러진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