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6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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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方伯 光顔 次退陶先生硏經書院韻 余及追 和 |
영어공식명칭 | Answer Yoon-Gwangan's Poem In Reply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곽명재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736년 - 「윤방백 광안 차퇴도선생연경서원운 여급추 화」 저자 최흥립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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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809년 - 「윤방백 광안 차퇴도선생연경서원운 여급추 화」 저자 최흥립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921년 - 『천옹집』 간행 |
배경 지역 | 화암 -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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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한시|칠언절구 |
작가 | 최흥립 |
조선 후기 대구 출신 학자인 최흥립이 윤광안의 「차퇴도선생연경서원운」에 화답하여 지은 한시.
「윤방백 광안 차퇴도선생연경서원운 여급추 화(尹方伯光顔次退陶先生硏經書院韻余及追和)」의 저자 최흥립(崔興岦)[1736~1809]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초명은 흥교(興敎), 자는 산보(山甫), 호는 천옹(喘翁)이다. 지금의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출신이다.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1705~1786]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저서로 『천옹집(喘翁集)』이 있다.
윤광안(尹光顔)[1757~1815]은 조선 후기 문신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자는 복초(復初), 호는 반호(盤湖)이다. 대사간·대사성·충청도관찰사·이조참의·부호군 등을 역임하였다. 윤광안은 1806년(순조 6) 2월에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여 1808년 1월에 이임하였다. 윤광안의 시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연경서원(硏經書院)은 대구 지역에 최초로 지어진 서원이다. 이황(李滉)[1501~1570]·정구(鄭逑)[1543~1620]·정경세(鄭經世)[1563~1633] 3인과 함께 별도로 향현사(鄕賢祠)를 세워 전경창(全慶昌)[1532~1585]과 이숙량(李淑樑)[1519~1592]을 제향하였던 서원이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의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연경서원의 터는 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과 북구 연경동 사이에 있다.
「윤방백 광안 차퇴도선생연경서원운 여급추 화」는 칠언절구(七言絕句) 두 수이다.
도술원종학이성(道術元從學以成)[도술의 근원을 좇아 학문을 이루니]
도연화액게연경(徒然華額揭硏經)[공연히 편액을 연경으로 걸었겠는가?]
사군사측군몽취(使君斯惻群蒙醉)[그대들의 뭇 몽매함과 취함 측은히 여기시어]
진중유시각환성(珍重留詩郤喚惺)[진중한 시 남겨 깨우칠 여지 만들어 주셨네]
수방공부적누성(收放工夫積累成)[방심 거두는 공부 쌓이고 쌓여 이루어지니]
장수유식유궁경(藏修遊息遺窮經)[장수하고 유식하며 경전 궁구하네]
선생유운침침고(先生遺韻浸浸古)[선생께서 남긴 시 점점 오래되어 가는데]
적식군몽기일성(擿埴群蒙幾日惺)[갈팡질팡하는 뭇 몽매함 언제나 깨달을까]
「윤방백 광안 차퇴도선생연경서원운 여급추 화」는 이황의 「화암서원(畵巖書院)」에 사용된 ‘청(青)’ 계열의 운목을 사용하여 지은 칠언절구이다. 마지막 운인 ‘성(醒)’을 ‘성(惺)’으로 바꾸었다.
「윤방백 광안 차퇴도선생연경서원운 여급추 화」는 구도(求道)의 자세가 드러난 시이다. 최흥립의 학문하는 자세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