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7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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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翼軫 |
영어음역 | Choe Ikji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윤오 |
성격 | 독립운동가|무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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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면 왜관동 258[현 왜관리]![]() |
성별 | 남 |
생년 | 1860년 7월 3일![]() |
몰년 | 1923년 11월 15일![]() |
대표경력 | 호위국원(扈衛局員) |
조선 말기 칠곡 출신의 독립운동가.
1860년(철종 11) 7월 3일에 칠곡군 왜관면 왜관동에서 태어났다. 궁중 호위국에 근무하던 1905년(고종 42)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매국 역적들을 처단하려는 거사 자금을 지원하였다가 체포되어 10년 유배형(流配刑)을 받았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당시 궁중 호위국원(扈衛局員)이던 최익진은 매국 역적들을 처단하려는 나인영(羅寅永)[대종교 창시자 나철(羅喆) 전 훈련원 부정자]의 계획에 적극 동조하여 민형식(閔衡植)[학부협판]과 함께 거사 자금 1,400원을 제공하였다. 나인영은 총기를 구입하고 행동 대원을 편성하여 수차례 저격을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결국 모두 체포되었다. 1907년 7월 3일의 평리원(平理院) 판결에서 최익진은 ‘유(流) 10년’을 선고받고 진도(珍島)로 유배되었다. 같은 해 황제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뒤에도, 의병장 김규식(金奎植)[청산리전투 대대장]의 의진(義陣)에 군량을 제공하는 등 의병 활동을 지원하였다.
1968년에 대통령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