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6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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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逑 |
영어음역 | Jeong Gu |
이칭/별칭 | 도가(道可),한강(寒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헌규 |
조선 중기 칠곡에서 활동한 학자 겸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고려 의종 때에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정극경(鄭克卿)을 시조로 삼고 본관을 청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는 청주정씨 성주파(星州派) 10세조 정효충(鄭孝忠)의 후손이다. 감찰 정응상(鄭應祥)의 손자이며 정사중(鄭思中)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신동이라 일컬었다. 7~8세에 『대학(大學)』의 어의(語意)와 대의(大義)를 알았으며 오건(吳健)에게 수학하고 이황(李滉), 조식(曺植)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1573년(선조 6)에 유일(遺逸)로 추천되어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사포서주부(司圃署主簿) 등에 제수되었다. 그 후 삼가(三嘉)·의흥(義興)·지례(知禮) 등의 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1580년(선조 13)에 창녕현감에는 부임하였다. 창녕현에서는 사경(四境)에 서재(書齋)를 지어 훈장을 두고 향음(鄕飮)·향사(鄕射)·양로(養老)의 예를 행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읍민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웠다. 이듬해에 지평(持平)이 되고, 동복현감(同福縣監)과 1585년(선조 18)에 교정랑(校正郞)을 지냈다. 그 후 통천군수·승지·감사·참판 등을 거쳐 1608년(광해군 1)에 대사헌이 되었으나 곧 임해군(臨海君)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관련자들을 용서하도록 상소한 뒤 귀향했다. 1614년(광해군 6)에 북당(北黨)에 무고(誣告)를 당하여 성주(星州)에서 칠곡의 노곡(蘆谷)으로 이거하였다가 2년 후 다시 칠곡 사수(泗水)로 옮겨 후진 교육에 진력하면서 여생을 마쳤다.
경학(經學)·산수(算數)·병진(兵陣)·의약(醫藥)·풍수(風水) 등 전 분야에 정통하고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으며 문장과 글씨에 능통했다.
『한강집(寒岡集)』, 『오복연혁도(五服沿革圖)』, 『심경발휘(心經發揮)』,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 등이 전해지고 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657년(효종 8)에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과 칠곡군 지천면 신리의 사양서원(泗陽書院) 등 여러 곳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