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509 |
---|---|
한자 | 李元禎 |
영어음역 | Yi Wonjeong |
이칭/별칭 | 사징(士徵),귀암(歸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헌규 |
성격 | 문신 |
---|---|
출신지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이암] |
성별 | 남 |
생년 | 1622년![]() |
몰년 | 1680년![]() |
본관 | 광주 |
대표관직 | 숭정대부 이조판서 |
조선 중기 칠곡 출신의 문신.
본관(本貫)은 광주(廣州). 자는 사징(士徵), 호는 귀암(歸巖). 고려 때 판전교시사(判典校侍事) 이집(李集)을 중흥시조로 하고, 승사랑(承仕郞) 이지(李摯)를 칠곡 입향조로 하는 광주이씨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부응교(副應敎) 이도장(李道長)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 부인은 벽진이씨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선비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648년(인조 26)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652년(효종 3)에 문과에 아원(亞元)으로 급제하니 31세였다. 검열(檢閱), 교리(校理)를 거처 1660년(현종 1)에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동래부사가 되었고, 재임 중 선치(善治)로 말(馬) 한필을 하사받기도 했다. 1673년(현종 14) 도승지에 오르고, 1677년(숙종 3)에 대사간·형조판서를 지냈다. 1678년(숙종 4)에 영남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할 때 오로지 그 일을 맡아서 늦추고 팽팽하게 함을 조절하니 백성들이 대동법을 지키면서 덕(德)을 기렸다. 1680년(숙종 6) 이조판서 때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유배되었다가 장살(杖殺) 당하였다. 신도비가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동산재에 있으며 번암 채재공(蔡濟恭)이 비문을 지었다.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이암(耳巖)에 살았다.
『귀암집(歸巖集)』 6권, 『경산지(慶山誌)』 2권, 『완부결송록(完府決訟錄)』 1권 등이 있다.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신광리에 있다.
죽은 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에 신도비가 있으며 번암 채재공(蔡濟恭)이 비문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