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4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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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鄧林 |
영어음역 | Yi Deungrim |
이칭/별칭 | 대재(大材),공암(孔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헌규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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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
성별 | 남 |
생년 | 1535년![]() |
몰년 | 1594년![]() |
본관 | 벽진 |
대표관직 | 도사(都事) |
조선 중기 칠곡 출신의 문신.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대재(大材), 호는 공암(孔巖). 신라 헌안왕(憲安王) 때 벽진태수로 용맹을 떨쳤던 이총언(李悤言)을 시조로 하는 벽진이씨 후손으로, 아버지는 참봉 이운(李運)이고, 어머니는 덕산황씨, 부인은 월성최씨이다.
1535년(중종 30)에 태어나 1564년(명종 19)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573년(선조 6)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랑(佐郞)에 이르렀다. 성품이 어질고 밝으며 단아(端雅)하였다. 효우(孝友)에는 하늘이 낸 인물이라 10세에 아버지 상(喪)을 당하자 무덤 근처에 여막을 짓고 무덤 지키는 일을 3년 동안 했다. 일찍이 인동현감이 되어 청렴결백으로 이름이 났다. 벼슬을 바꾸어 돌아갈 때 한 여자 종이 짚신을 신고 있는 것을 보고 관리의 전별(餞別) 물품임을 알고는 말하기를 “이것 또한 관물(官物)이다.”라고 하고 길가 바위 위에 버리라고 명령했다. 훗날 사람들이 구미시 인동에 있는 그 바위를 괘혜암(掛鞋巖)이라고 이름 붙였다. 어려서부터 뜻을 독실히 하고 학문에 힘을 써서 지극한 행실로 추앙을 받았다. 후진을 교육하는 데 많은 노력을 하였으며, 향당(鄕黨)에서는 김우옹(金宇顒), 정구(鄭逑) 등과 더불어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石田)에서 노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