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융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0637
한자 王隆
영어공식명칭 Wang Yung
이칭/별칭 용건(龍建),문명(文明),세조(世祖),위무대왕(威武大王),원렬(元烈),민혜(敏惠),창릉(昌陵)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강원도 철원군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
집필자 홍승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896년 - 왕융 궁예에게 귀부
활동 시기/일시 896년 - 왕융 금성태수로 부임
몰년 시기/일시 897년 05월연표보기 - 왕융 사망
추모 시기/일시 919년 3월 13일 - 왕융 세조 위무대왕으로 추존
출생지 송악군 -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
묘소|단소 창릉 -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 남포리
사당|배향지 태묘 -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
사당|배향지 경령전 -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
성격 호족
성별

[정의]

남북국 시대 철원 지역을 도읍으로 건국한 궁예에게 귀부한 호족.

[개설]

왕융(王隆)[?~897]은 송악군[현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을 거점으로 대대로 독자적 세력을 유지해 온 지방 호족이다. 896년 궁예가 철원을 도읍으로 삼아 건국하자 궁예에게 귀부하였다. 고려를 개국한 왕건(王建)의 아버지이다.

[가계]

왕융의 본관은 개성(開城)이고, 자는 문명(文明)이다. 어릴 적 이름은 용건(龍建)이다. 위숙왕후(威肅王后) 한씨(韓氏)와 결혼하여 877년에 아들 왕건을 낳았다. 개성왕씨(開城王氏)를 성씨로 사용한 시점과 관련하여 왕융의 선대로 보는 설과 아들 왕건 이후로 보는 설이 함께 전하고 있어서 초명을 왕용건(王龍建)으로 볼 여지도 있다.

왕융의 선대에 대해서는 세 가지 계통의 계보가 전한다. 첫 번째로 『태조실록(太祖實錄)』 세계와 『왕대종족기(王代宗族記)』에는 왕융의 아버지가 의조경강대왕(懿祖景康大王), 어머니가 원창왕후(元昌王后)이고, 할아버지는 국조원덕대왕(國祖元德大王), 할머니는 정화왕후(貞和王后)라는 간략한 계보가 실렸다. 두 번째로 고려 전기에 편찬된 『편년통록(編年通錄)』에는 왕융의 할머니인 정화왕후가 당나라 숙종과 결혼하여 왕융의 아버지인 작제건(作帝建)을 낳았으며, 국조원덕대왕은 왕융의 할아버지가 아니라 외증조할아버지인 보육(寶育)으로서 조카 덕주(德周)와 결혼하여 정화왕후를 낳았다는 이설이 신화적인 각색을 거쳐 수록되었다. 세 번째로 『성원록(聖源錄)』에서는 보육이 국조원덕대왕의 외할아버지이고, 정화왕후는 보육의 외손주며느리라는 또 다른 계보를 제시하였다. 『태조실록』과 『왕대종족기』, 『편년통록』, 『성원록』 모두 현재 전하지 않고 고려 왕실 세계와 관련된 기록들만 『고려사(高麗史)』에 일부 발췌된 상황이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엄밀한 교차 검토를 통하여 왕융의 선대를 확정짓는 것이 불가능하다.

[활동 사항]

896년 궁예가 고구려의 옛 땅을 점유하고 철원성을 도읍으로 삼아 국가를 세우자 송악군의 사찬이었던 왕융은 자신의 세력을 거느리고 궁예에게 귀부하였다. 궁예왕융의 자발적인 귀부를 치하하며 금성태수에 임명하였다. 이후 왕융궁예에게 삼한 통일을 위하여 먼저 송악에 성을 쌓고 왕건을 성주로 삼아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궁예왕융의 제안을 수용하여 발어참성을 쌓고 왕건을 성주로 임명하였다. 왕융은 897년 5월 부임지인 금성군에서 사망하였다.

[묘소]

왕융의 묘소는 영안성 인근 석굴에 조성되었다. 영안성은 왕융의 선대가 예성강 입구에 축조한 토성으로, 황해북도 개풍군 남포리에 터가 남아 있다. 왕융의 묘소는 여타의 왕릉들과 달리 산이 아닌 강가에 조성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부인 위숙왕후 한씨와 합장되었고, 묘소는 창릉(昌陵)으로 불렸다.

[상훈과 추모]

고려 태조 왕건은 즉위 다음 해인 919년 3월 13일 3대를 추존하며 아버지 왕융의 묘호를 세조(世祖), 시호를 위무대왕(威武大王)으로 하였다. 1027년 현종은 왕융의 시호에 원렬(元烈)을 추가하였고, 1253년에는 고종이 민혜(敏惠)를 추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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