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8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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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郭始徵 |
이칭/별칭 | 경숙(敬叔),지숙(智叔),경한재(景寒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경수 |
조선 후기 천안 출신의 학자.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경숙(敬叔) 또는 지숙(智叔), 호는 경한재(景寒齋)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시정(寺正)을 지낸 곽회영(郭懷英), 아버지는 사헌부 집의를 역임한 곽지흠(郭之欽)이다. 아버지 곽지흠의 첫째 부인은 선교랑(宣敎郞) 성준웅(成俊雄)의 딸 창녕 성씨(昌寧成氏)이며, 둘째 부인은 도사를 역임한 김옥(金鋈)의 딸 안동 김씨(安東金氏)이다. 곽시징은 안동 김씨의 소생이다. 부인은 현감 이필(李怭)의 딸 연안 이씨(延安李氏)이다.
곽시징(郭始徵)[1644~1713]은 스승 송시열(宋時烈)의 천거로 참봉이 되었으나, 기사환국이 일어나자 벼슬을 그만두었다. 송시열이 제주도로 유배되자 문인들과 함께 그 원통함을 상소하였고, 송시열이 사사된 뒤 태안(泰安)에서 두문불출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여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1694년(숙종 20)에 목천의 옛 집으로 돌아와 도리를 강론하였고, 1703년에는 목릉 참봉(穆陵參奉)을 거쳐 왕자사부(王子師傅)로 연잉군(延礽君)[후에 영조]을 교육하였다. 그 뒤 별제(別提)·이인 찰방(利仁察訪)을 역임하였다. 만년에는 공주(公州)에 거주하였고, 1713년(숙종 39) 4월에 사망하였다.
송준길(宋浚吉)·송시열의 문인으로 기호 학통을 이었으며, 특히 예서를 깊이 연구하였다. 1708년(숙종 34)에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이 “왕자사부 곽시징은 경학에 밝고 행실이 착하니, 청컨대 강경에 제수하여 6품으로 승진시키소서.”라는 진언을 했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학문이 상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 공주에 장사지냈다가 목천의 선영 아래로 이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