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5034 |
---|---|
한자 | 熊神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 |
집필자 | 남재우 |
신라 경덕왕 대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 지역의 옛 지명.
신라 때 웅지현이었다가 신라 경덕왕 때 웅신현으로 고쳐서 의안군의 속현이 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금주[김해]에 예속되었다가 조선 1452년(문종 2)에 웅신현과 완포현을 합쳐 웅천현으로 고쳤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2, 웅천현 건치 연혁조에는 “본래 신라의 웅지현이다. 경덕왕이 웅신이라 고쳐서 의안군의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현종은 금주에 예속시켰다. 본조 세종조에는 구자를 설치하여 첨절제사를 두었으나, 문종조에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현감을 두었다.[本新羅熊只縣 景德王改熊神 爲義安郡領縣 高麗顯宗屬金州 本朝世宗設口子 置僉節制使]”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인 1407년(태종 7)에 웅신현의 내이포[혹은 제포]가 개항되어 왜관이 설치되었다. 세종 때에 제포에 수군첨절제사영(水軍僉節制使營)이 설치되어 안골포·사량·당포·영등포·옥포·조라포·평산포·적량 등 8진을 관할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호구 수는 웅신현이 63호, 318인이었다.
신라 시대에는 웅지현이었는데 경덕왕 때 웅신현으로 고쳐 의안군의 속현이 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금주[김해]에 예속되었다가 고려 말에는 칠원으로 이속되었다. 조선 문종 대에 웅천현으로 고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