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4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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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昌原大都護府 |
영어음역 | Changwon-daedohobu |
영어의미역 | Changwon-daedohobu Administration District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정용 |
조선 후기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 설치되었던 행정구역.
조선시대 지방의 행정과 군사상의 중심지인 대도호부가 설치된 지역은 강릉·안동·안변·영변 그리고 창원이었다. 대도호부가 되기 전에 창원은 도호부였는데,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01년(선조 34) 창원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이는 창원이 행정과 군사상의 중심 지역으로 변모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임진왜란 당시 창원도호부에서는 기나긴 전쟁의 와중에서도 병사(兵使) 겸 부사인 김응서(金應瑞)와 그를 따르는 민관군 중 한 사람도 왜적에 항복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에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이 이러한 내용을 보고함으로써 창원은 1601년(선조 34) 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창원대도호부의 관할 구역은 시기에 따라 폐합과 이속 등에 따른 변동이 있었다. 대도호부가 되면서 칠원군이 통합되었다가 1617년(광해군 9)에 분리되었고, 1627년(인조 5)에는 진해가 소속되었다가 2년 뒤 분리되었다. 대체로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김해까지 6.8㎞, 서쪽은 함안까지 10.8㎞, 남쪽은 김해 관하인 웅신(熊神)까지 12.8㎞, 북쪽은 칠원(漆原)까지 9.6㎞였다. 인구 현황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나타나는 조선 전기에는 호수가 1,094호이며 인구는 4,955명이다. 여자는 제외된 숫자로 판단된다.
조선 후기 자료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총 호수가 7,344호이며, 인구는 28,309명으로 전기에 비하여 호수는 6,250호, 인구는 23,354명이 증가하였다. 창원이 대도호부가 된 60년 후인 1661년(현종 2) 문묘의 전패(殿牌)가 분실된 사건을 계기로 창원대도호부를 창원현으로 격하하여 현감이 파견되었다가 9년 후인 1670년(현종 11)에 창원대도호부로 환원되어 1895년(고종 32)까지 존속하였다.
임진왜란기를 통하여 지역민들 중에서 한 사람도 왜적에게 항복한 사람이 없었음은 경험을 통하여 축적된 왜구에 대한 항거심과 적개심이 구체화되어 나타난 결과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이 평가되어 대도호부로 승격된 것은 지역민들이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표창의 의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