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7328 |
---|---|
한자 | 草邑洞南平文氏世居地 |
영어의미역 | Residential Place of Nampyeong Mun clan in Choeup-dong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초읍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오인택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초읍동에 있는 남평 문씨 세거지.
남평 문씨(南平文氏) 충선군 문익점(文益漸)이 거주하였던 곳이 강성[단성 혹은 산청]이어서 사후에 강성군(江城君)으로 봉하여졌다. 이후 그 후손들이 강성을 본관으로 하는 강성 문씨 충선군파, 혹은 남평 문씨 충선군파로 불리기도 하였다. 원래 남평 문씨 일족이었기 때문이다.
남평 문씨[강성 문씨]의 충선공파 파조인 문익점의 후손은 이후 5개의 분파로 나뉘었는데, 그중 의안공파에 속하였던 문평(文苹)은 조선 전기 강성에서 동래로 이주하여 남평 문씨[강성 문씨] 동래 문중 파조가 되었다. 이후 동래 문중은 120~180여 년 이상 번창하면서 대대로 거주하던 동래부의 각 지역에 따라 7개의 문중[성안파, 사상파, 초읍파, 북면파, 금사파, 거벌파, 반여파]으로 분화하였다. 이 가운데 초읍파 동래 문중이 조선 후기 초읍동에서 대대로 살았기 때문에 초읍동 남평 문씨 세거지라 하였다.
초읍(草邑)은 새터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초읍의 ‘초’는 ‘새’로 읽히고, 읍은 ‘량·탁·벌·성’ 등의 터로 읽힌다. 새터는 새로운 터전, 새로운 자리라는 뜻이다. 왜구의 침입으로 치소(治所)를 이동한 데서 유래하였다. 즉 동평현의 치소가 지금의 당감동 부근이었는데, 고려 후기 빈번한 왜구의 침입으로 치소가 피폐해지자 새로운 마을로 치소를 옮기고 그곳을 새터, 즉 초읍으로 부른 데서 유래하였다.
문익점의 손자인 의안공파 문평이 조선 태종(太宗) 대인 1410년경 동래로 입향하였다. 16세 문응필(文應弼)과 문응규(文應奎)가 1500년대 후반 초읍으로 이거하였다. 문응필의 아들 문진명(文進明)은 주례동으로 이거하고 초읍동에는 문응규의 자손들이 세거하였다.
초읍동은 금정산의 남북으로 통하는 요충지에 위치한다. 북쪽으로 금용산을 등지고, 남쪽으로는 연지를 지나 부산 평야로, 동쪽으로는 화지산이 서쪽으로 달려가는 형상의 작은 산맥이 둘러싸고 있다. 또한 서쪽으로 금용산[쇠미산]의 산맥이 뻗어 있어 마을이 마치 천연의 성벽을 이루는 분지와 같다.
2013년 현재 초읍동에서는 남평 문씨[강성 문씨] 33세손까지 이어 오고 있다. 동래 문중에 속한 7개 파 가운데 초읍파로, 문중 제사는 금정구 남산동에 있는 동성재에서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