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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동 상덕 마을 남평 문씨 세거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184
한자 江東洞上德-南平文氏世居地
영어의미역 Gangdong-dong Nampyeong Mun Ancestral Village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부산광역시 강서구 강동동 상덕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상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세거지
가구수 약 10가구
세거지 강동동 상덕 마을 남평 문씨 세거지 - 부산광역시 강서구 강동동 상덕 마을

[정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강동동에 있는 남평 문씨 세거지.

[개설]

남평 문씨(南平文氏)의 대동보(大同譜)로 가장 오래된 신해보[1732, 영조 3]에 의하면, 남평 문씨의 시조인 문다성(文多省)은 통일 신라 말에 태어나 왕건(王建)을 도와 개국 공신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다성의 아들 문탁(文倬)이 문하시랑(門下侍郞) 찬성사(贊成事) 상주국(上柱國) 태사(太師) 태부(太傅)였으며, 이후 문천강(文天降)·문주백(文周伯)·문승조(文承祖)·문성화(文聖和)·문인걸(文仁傑)·문지원(文智遠)·문정(文挺)·문중달(文仲達)·문극유(文克裕)·문효제(文孝悌)·문장창(文章昶)·문정(文正) 등 12세를 기록하였으나 고증하기 어려워 고려 헌종(獻宗) 때 상주국 평장사(上柱國平章事)를 지낸 경절공(敬節公) 문익을 중시조(中始祖) 1세로 하였다.

2세 문공유(文公裕)가 북병마사(北兵馬使)·형부 상서·예부 상서를 지냈고, 3세 문극겸(文克謙)은 고려 의종(毅宗)·명종(明宗)에 걸친 중신으로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와 감수국사(監修國史)·태사(太師)·태부(太傅)를 지냈으며, 4세 문후식(文侯軾)은 태부경동북면 지병마사(太夫卿東北面知兵馬使)를 지냈고, 5세 문정은 정순대부(正順大夫) 집현전(集賢殿) 제학(提學)을 지냈으며, 6세 문중연(文仲連)은 벽상 공신 상주국 문하시랑(壁上功臣上柱國門下侍郞)을 하였고, 8세 문득준(文得俊)은 탐라(耽羅) 해적을 토평(討平)하고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9세 문극검(文克儉)은 사의대부(司儀大夫) 개성 부윤(開城府尹)을 하였으며, 10세 문윤각(文允恪)은 충혜왕 때 봉익대부(奉翊大夫) 삼사 우사 문한 학사(三司右使文翰學士)를 하였고, 11세 문숙선(文叔宣)은 공민왕 때 한림원(翰林院) 학사(學士)와 좌정언(左正言), 지제교 사간원 헌납(知製敎司諫院獻納)을 지냈다. 문숙선의 아들 12세 문익점(文益漸)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직강 대학 박사(藝文館直講大學博士)에서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지내고 좌사의대부 우문관 제학(左司議大夫右文館提學)을 지내면서 중국에 갔다 돌아올 때 목화씨를 가져와서 우리나라 최초로 무명베를 입게 하였다. 그 외에도 강서구 강동동 상덕(上德) 마을 남평 문씨 집안은 대를 이어 많은 인물을 배출한 명문가이다.

[명칭 유래]

상덕이라는 지명은 마을이 덕도산(德島山) 북쪽 기슭에 있었다는 설과 덕도에서 면사무소가 있는 가장 큰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형성 및 변천]

남평 문씨 중시조 상서 평장사(尙書平章事) 경절공 문익의 23세손 장사랑(將仕郞) 문열생(文烈生)이 1650년대에 김해로 이주하여 관간재(觀澗齋)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26세손 문정유(文禎侑)가 김해 삼계로 이주 정착하여 삼계 문중을 이루어 현제 425가구로 번창하였으며, 그중 28세손 문학(文㶅)이 1775년경 강서구 강동동 상덕 마을로 와서 정착하여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강서구 가락동 봉림 마을 문평 문씨와 형제 집안으로 집안의 큰 행사는 모두 함께하면서 서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왕래하며 240년 가까이 세거하면서 살아왔다.

[자연 환경]

상덕 마을은 낙동강 삼각주를 구성하는 하중도에 자리하는데, 서쪽으로는 서낙동강이 흐르고, 동쪽으로는 평강천이 흐른다. 옛날에는 덕도산을 중심으로 한 작은 섬[덕도]이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낙동강 제방 공사로 대저와 녹산 수문을 만들어 평야 지대를 만들었다.

[현황]

남평 문씨가 한창 번성할 때는 강서구 가락동 상덕 마을에 20~30가구가 살았으나, 2013년 현재는 약 10가구가 있다. 상덕 마을에는 재실이 없으나, 가락동 봉림 마을에 남평 문씨 종중 재실인 경모재(景慕齋)문위열을 모신 아산재(我山齋)가 있다. 그리고 최근 문동조가 수암재를 세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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