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73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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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壽安洞秋溪秋氏世居地 |
영어의미역 | Suan-dong Chugye Chu Clan Hometow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영진 |
[정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에 있는 추계 추씨 세거지.
[개설]
추계 추씨(秋溪秋氏) 시조인 추엽(秋饁)은 남송에서 예부 상서를 역임하고 우리나라 함흥 연화도에 정착하였다. 3세 추적(秋適)은 고려에서 민부 상서, 문하시중을 역임하였고, 『명심보감(明心寶鑑)』을 배열, 편집한 것으로 유명하다. 8세 우천(愚川) 추익한(秋益漢)은 한성 부윤에서 물러난 후 영월에서 단종(端宗)을 모시다가 자결하여 충신으로 이름났다. 10세 추수경(秋水鏡)은 임진왜란 때 평양, 한양, 진주, 동래성을 탈환하는 공적을 세워 완산 부원군에 봉군되었는데, 위 세 사람의 묘역은 지방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명칭 유래]
동래 토박이들에 의하면 수안동은 수안(首安) 또는 수안(水安)으로 쓰였다. 수안(首安)은 동래부의 수장이던 동래 부사가 집무하던 동헌이 이곳에 자리 잡고 있어 가장 으뜸 되는 관아 안이라는 뜻이며, 또 수안(水安)은 당시 땅 밑을 조금만 파내려 가면 물이 나오는 등 물이 흔해 붙여진 이름으로 풀이한다. 또한 이곳에 동래읍성의 수문이 있었고 수문안의 동네라고 풀이하는 사람도 있다.
[형성 및 변천]
부산 지역 추계 추씨는 추수경(秋水鏡)[1530∼1600, 세심당공파(洗心堂公派)]의 후예인 추시강(秋時岡)[1633∼1687]의 자손들이다. 추시강이 17세기 중반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에서 동래읍으로 입향한 후 그 자손이 동래구 수안동에 자리 잡았다. 그의 묘소는 금정구 선동에 있다. 『추계 추씨 족보』에 따르면, 추시강의 손자 추만성(秋萬成)[1676∼1759]과 현손인 추운룡(秋雲龍)[1752∼1828]은 모두 절충장군으로 용양위(龍驤衛) 부호군을 지내며 집안의 기틀을 잡았다.
1937년 발간된 『동래군지(東萊郡誌)』에 참봉 추종엽(秋鍾燁)[1875∼?]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그는 동래 부호로서 동래은행과 동래고등여학교[동래여자고등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였다. 추봉찬(秋鳳璨)[1883∼1946]은 대한 제국 탁지부 세무주사와 독립 자금을 마련한 백산상회 동래 지배인, 동래일신여학교 기성 회장을 맡아 일제 강점기 민족 경제와 교육 발전에 힘쓴 선각자였다.
추봉찬의 아들 추규영(秋圭映)[1903∼1977]과 추월영(秋月映)[1906∼2005] 형제는 이 문중이 낳은 대표적 인물들이다. 추규영은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으로 동래 지역 3·1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고, 부산 사세청장을 거쳐 1953년 전라남도 도지사를 역임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추월영은 한글학회 회원으로 6·25 전쟁 중에서도 『우리말 큰사전』 원고를 지킨 한글 학자이자 부산여자고등학교와 경남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며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하는 등 부산 교육계의 원로였다. 추규영의 아들 추경석(秋敬錫)은 국세청장과 건설교통부 장관을 역임하여 동래 지역 출신 최초의 국무 위원이 되었다.
[자연 환경]
수안동 일대는 조선 시대 동래 읍성의 남문 일대와 성 바깥쪽에 해당된다. 서쪽과 남쪽은 온천천과 접한다. 대부분이 평지이나 현재의 동래경찰서 자리에는 농주산(弄珠山)이 있었다. 풍수지리상 동래 읍성의 안산(案山) 구실을 하는 곳이었으나, 일제 강점기 착평되어 평지가 되었다. 남문에서 세병교로 이어지는 도로 일대는 지대가 낮아 일제 강점기까지만 하더라도 농사가 어려운 저지대였다. 온천천을 따라 제방이 축조되며 현재와 같이 변화되었다.
[현황]
1904년 발간된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에는 추계 추씨 29가구가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읍내면 9가구, 북면 2가구, 사중면 4가구, 사하면 10가구, 동평면 2가구, 남상면 1가구, 동하면 1가구가 산재하고 있다. 읍내면과 사하면의 석남동(石南洞)은 추계 추씨 집성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매년 음력 10월 첫 일요일에 금정구 선동에 있는 입향조 추시강의 묘소에서 시제를 올리고 있다. 동래구 복천동에 있던 영모재(永慕齋)는 동래 문화 회관 자리로 수용되어 지금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