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5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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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中里-盤如洞- |
영어의미역 | Jungri Village[Banyeo-dong]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여동 중리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주영택 |
성격 | 자연 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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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시기/일시 | 1914년 - 경상남도 동래군 동래읍 반여동 |
변천 시기/일시 | 1942년 - 경상남도 동래군 동래읍 반여동에서 경상남도 부산부 동래출장소 반여동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57년 - 경상남도 부산부 동래출장소 반여동에서 경상남도 부산시 동래구 반여동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78년 - 경상남도 부산시 동래구 반여동에서 부산직할시 해운대출장소 반여동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80년 - 부산직할시 해운대출장소 반여동에서 부산직할시 해운대구 반여동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95년 - 부산직할시 해운대구 반여동에서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여동으로 개편 |
자연 마을 | 중리 마을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여동 중리 마을 |
[정의]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여동에 있는 자연 마을.
[명칭 유래]
중리(中里)는 반여동의 중간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형성 및 변천]
중리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1700년경 남평 문씨(南平文氏)가 살았다고 전하며, 이후 남평 문씨와 청도 김씨(淸道金氏)의 집성촌을 이루었다. 마을은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 “중리 마을 장산 쪽으로 올라가면 신라 시대 창건한 인지암(仁智庵)이라는 암자가 있었으나 빈대가 너무 많아 폐사되었다.”라고 하여 오랜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마을은 조선 후기 동래부 동면에 속하였다가 이후 동상면으로 분리되었으며, 1914년 동래읍 반여동에 속하였다. 1942년 부산부 동래출장소에 속하였으며, 1957년 동래구에 속하였다가 1978년 해운대출장소에 편입되었다. 1980년 해운대출장소가 해운대구로 승격하였다. 1995년 부산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승격하면서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여동 중리 마을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자연 환경]
중리 마을은 장산에서 북서쪽으로 뻗은 위봉[262m]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 북쪽에서 흐르는 석대천이 남서쪽에서 수영강에 합류한다.
[현황]
중리 마을은 반여 1동 20~24통 지역으로, 반여동의 중간에 자리 잡았던 자연 마을이다. 마을의 북쪽 석대천 변으로 국도 14호선과 부산 지하철 3호선이 통과하며, 반여 농산물 시장역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 내에 태광산업 반여공장이 있고, 그 서쪽으로 반여 농산물 도매 시장이 있다. 마을 내에 『동래부지』에 기록된 인지암으로 추정되는 절터가 있고, 반석초등학교가 자리한다.
장산 기슭[반여 1동 산119번지]에 자리한 중리 당산에서 매년 1월 14일 자정에 당산제를 지냈으나 현재는 오후 6시로 변경하였다. 마을 내에 옛 마을의 흔적인 골목길이 일부 남아 있으나, 대부분 공장과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며 빠르게 옛 흔적이 사라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