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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5870
한자 體育
영어의미역 Physical Education
분야 문화·교육/체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권오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4년연표보기 - 부산체육회 창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5년 10월연표보기 - 광복 기념 축하 단축 마라톤 대회 개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5년 11월 3일연표보기 - 부산·경남 육상 경기 대회 개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7년 10월 18~24일연표보기 - 제38회 전국 체육 대회 개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3년 3월 17일 - 부산직할시 체육회 창립총회 개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3년 10월 12~17일연표보기 - 제54회 전국 체육 대회 개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6년 10월 12~17일연표보기 - 제57회 전국 체육 대회 개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6년 6월 20~25일연표보기 - 제67회 전국 체육 대회 개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5년 5월 23일 - 제14회 아시안 게임 개최지 부산으로 확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7년 5월 10~19일연표보기 - 제2회 부산 동아시아 대회 개최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0년 10월 12~18일연표보기 - 제81회 전국 체육 대회 개최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1년 5월 9~11일연표보기 - 제21회 전국 장애인 체육 대회 개최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1년 6월 2~5일연표보기 - 제30회 전국 소년 체육 대회 개최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2년 9월 29일~10월 14일연표보기 - 2002년 아시안 게임 개최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2년 10월 26일~11월 1일연표보기 - 제8회 부산 아·태 장애인 경기 대회 개최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2년 5월 31일~6월 30일연표보기 - 2002년 월드컵 대회 개최

[정의]

부산광역시에서 심신을 단련하고 여가 및 운동 능력을 기르기 위해 실시하는 제반 활동.

[개설]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인간의 체육 활동은 종족의 보존과 음식물의 획득 등 의식주 해결을 위한 생존의 도구였다. 원시 시대의 거친 자연환경에서 자연과 맹수와의 투쟁 과정을 통해 던지고, 달리고, 뛰어넘는 등의 신체 기량은 생존을 위한 필수 요건이었으며, 불의 발견, 도구의 제작 그리고 정착과 농경 생활로 이어지는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으로 연결되어 체육이라는 개념으로 정착되었다. 이후 정착 생활과 농경 생활은 새로운 형태의 부족 국가를 형성하였으며, 체육은 전쟁과 군사력 강화의 수단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제천 의식의 일환으로 무용과 신체 활동이 성행하였다.

부산 지방에서 확실히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신석기 시대부터 확인된다. 이 시대에 부산은 낙동강과 넓은 해안선을 끼고 있는 지리적 조건과 따뜻한 기후 등의 자연적 조건 등 당시 사람이 살기에 적당한 환경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지방에 비해 많은 유적들이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확인된 유적은 조개더미가 대부분인데, 특히 섬 지방인 영도에 가장 많고 나머지는 낙동강 하구 주변과 부산의 남쪽 바닷가에 위치한다. 이들 유물 중에는 돌도끼와 빗살무늬 토기와 함께 갈아서 만든 화살촉과 끌 등이 포함되어 있어 당시 의식주 해결을 위한 다양한 신체 활동이 행해졌음을 암시한다.

삼국 시대에는 전쟁이 빈번해지면서 무술과 말타기, 격구, 씨름, 수영, 수박 등의 무예 활동이 두드러졌다. 따라서 체육 역시 무예와 관련이 깊은 상무적 놀이가 주를 이루었다. 예를 들어 수렵은 선사 시대에는 생산 활동으로 행해졌지만 삼국 시대 이후에는 무예뿐만 아니라 놀이로도 행해졌다. 다만 귀족들은 전쟁을 전담하고 직접 생산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기에 그만큼 삶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경제력을 함께 가진 귀족들은 수렵, 말타기, 활쏘기 같은 무예 위주의 놀이를 즐겼다. 이에 평민은 전쟁에 동원될 뿐만 아니라 생산 활동도 담당해야 했기 때문에 신체를 이용한 무예를 놀이화한 수박, 씨름 등을 즐겼다. 그 외에도 투호, 축국, 대말타기 등도 있었다.

4세기 대의 부산을 중심으로 한 낙동강 하류 지역의 분묘에서는 철족(鐵鏃), 철모(鐵鉾), 대도(大刀) 등 전쟁을 수행할 만한 각종 공격용 무구가 풍부하게 출토되고 있다. 이는 낙동강 하류 지역의 가야 집단을 이해하는 수단으로서 부산 지역의 문화 및 무예와 관련한 신체 활동을 고증하는 귀중한 사료이다. 고려 시대에는 이전 시대의 신체 활동들이 여전히 성행했으며, 동시에 새로운 신체 활동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방식도 한층 세련되어졌다. 특히 귀족들의 상무적 놀이는 삼국 시대에 비해 비교적 평화 상태가 지속되어 그 내용도 삶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형태로 정착되었다. 상무적 신체 활동인 격구는 귀족들의 대표적 놀이가 되었으며, 활쏘기와 수박도 더욱 다양한 경기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이는 전쟁을 위한 신체 활동이 아니라 놀이로서의 신체 활동이 더욱 성행하였음을 암시한다. 또한 고려 시대에는 생활 풍속적인 놀이가 성행하였는데 그네뛰기, 장치기 등이 새롭게 나타났다. 특히 상무적 놀이인 석전이 민간의 풍속적 놀이로 발전해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조선 시대에는 삼국 시대 이래의 놀이들이 성행하였다. 그러나 숭문적 사회 분위기로 인해 상무적 놀이는 점차 쇠퇴하였다. 그중 일부는 무예로만 실시되기도 했지만 활쏘기의 경우 유교적 소양을 기르고자 하는 지배층의 중심 놀이로 성행하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상무 놀이는 민간의 풍속적 놀이로 변했으며 특히 풍년을 기원하거나 건강과 다산을 기원하는 세시 풍속으로 바뀌었다. 줄다리기, 줄넘기 등이 생겨났으며 여성의 놀이, 계절과 관련된 놀이, 그리고 아이들의 놀이, 양반 놀이 등 각계각층의 다양한 놀이 문화가 생성되었다. 이처럼 다양한 변화 속에서 그네뛰기나 씨름처럼 조선 시대에 들어서 신분의 구별 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놀이가 생겨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변천]

1. 일제 침략하의 부산 체육

일제는 국권 강탈 이후 통치권을 갖게 되자 정치·사회·문화·경제 등 모든 면에서 우리의 고유한 전통을 파괴해 갔으며, 모든 집회는 허가제로 하였다. 특히 군중이 모이는 집회나 운동회는 좀처럼 허가하지 않았으며, 대회 개회사는 사전에 검열을 받도록 하였다. 어쩌다 대회가 개최되더라도 일본 경찰의 감시 아래 열리는 등 고난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당시 줄다리기는 가장 인기 있는 종목이었는데, 동래천을 사이에 두고 서북 2편으로 나누어 정월 보름에 농악을 치고 각 진영에 승전기를 세우고 승부를 외치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1920년경 철도 공창의 일인을 중심으로 한 야구팀이 있었으며, 동래고보, 부산상고, 초량청년회 등 소수 팀이 있었다. 연습장은 지금 부산진역 철로인 당시의 해변 쪽 갈대밭 광장을 이용하였다. 축구는 1922년경부터 남선 축구 대회, 소년 축구 대회를 해마다 개최하였다. 부산에서는 고관청년회가 주최하는 유일한 단체 경기로서 민족 단결과 체위 향상을 위해 철도 운동장에서 개최하였다.

부산의 체육 단체는 동래 방면의 동래체육회, 부산진 방면의 부산체육회, 수정 방면의 수정체육회, 초량 방면의 중앙체육회, 대신동 방면의 서부체육회, 영도 방면의 영도체육회 등 6개 단체가 있었으며, 1934년 부산의 기존 6개 체육회를 통합하여 부산체육회가 창립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 일본이 불리해지자 신사 참배, 창씨개명 등 민족 말살 정책이 더욱 심해지는 과정에 민족적 체육 단체인 부산체육회는 해체되고 관제인 경남체육회가 발족하여 일인 주도하에 각종 체육 대회가 개최되게 되었다.

2. 광복 후의 부산 체육

광복 후의 극심한 사회 혼란은 부산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더욱 항도 부산은 해외에서 귀환한 동포들로 더욱 민심이 문란하였으며 체육 활동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부산의 육상 경기인들이 주동이 되어 체육회를 구성하였다. 김일동, 김성필, 성훈영, 오경인, 김원곤, 이만용, 배종하 등이 중심이 되어 부산 육상 경기 동호회를 조직하여 배치도를 회장으로 추천하고 바로 광복을 기념하는 축하 단축 마라톤 대회를 1945년 10월 구 부산일보사 앞에서 범어사 입구까지 왕복으로 거행하였다. 당시 참가자는 20명에 불과했지만 광복 후 부산 체육의 첫 행사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이 후 변일규, 박종화 등이 모여 부산축구협회를 결성하였으며 울산에서 열린 영남 축구 대회에 참가하여 우승하는 등 부산 체육 발전에 기여하였다. 1945년 11월 3일 부산 공설 운동장에서 부산·경남 육상 경기 대회를 개최하면서 체육회 결성의 필요성을 공감하여 오경인, 김갑조, 김성필, 변일규 등이 모여 회장 양성봉, 부회장 박선기를 선임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부산체육회가 발족하였다. 그러나 행정 구역상 경상남도에 속해 있던 부산은 1963년 부산직할시로 승격하기 이전까지 경남체육회 산하 경기 단체와 공존하는 더부살이를 이어왔다.

3. 부산직할시 시대의 부산 체육

1963년 1월 1일자로 부산시가 직할시로 승격하면서 경상남도와 분리됨에 따라 부산직할시 체육회는 신설에 따른 분리 계획을 수립하고 동년 3월 17일에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초대 회장에 김현옥 부산시장을 선임하였다. 그 후 부산의 체육은 부진을 면치 못했으나 1972년 제53회 전국 체육 대회와 1973년 제54회 전국 체육 대회에서 연속 준우승을 하며 부산 시민의 단합된 모습을 과시하였다. 더욱이 1957년 제38회 대회 이후 16년 만에 개최한 제54회 부산 대회는 거시적인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침으로써 부산 체육의 자신감을 회복시켰다. 그 후 1976년 개항 100주년을 맞이하여 제57회 전국 체육 대회를 유치 개최하였으나, 개최지라는 유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5위에 머물렀다.

1980년도부터 건립하기 시작하여 완성 단계에 있는 사직 종합 운동장, 86 아시안 게임, 88 서울 올림픽을 대비한 요트 경기장과 기타 체육 시설의 확충, 학교 체육 및 사회 체육의 활성화 시책으로 우수 선수의 발굴 및 육성, 우수 지도자 및 선수의 취업 문제, 실업 팀의 창단, 직장 팀의 육성, 가맹 경기 단체의 조직 정비, 가맹 경기 단체와 의료 기관의 자매결연과 체육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한 체육 진흥 기금 조성 등을 추진하였다. 1986년 제67회 전국 체육 대회는 제10회 아시안 게임의 리허설 형식으로 예년보다 3개월 앞당겨 부산, 서울, 경기도에서 분산하여 개최하였다. 부산에서는 요트 경기가 진행되었으며 경기 결과 종합 4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4. 부산광역시 시대의 부산 체육

1995년 1월 1일 지방 자치법 개정으로 부산광역시로 개칭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동년 5월 23일 제14회 아시안 게임 개최지가 부산으로 확정됨에 따라 부산의 체육은 그 위상을 드높였다. 이미 준비 과정으로 1993년부터 국제 행사를 개최할 수 있는 주 경기장과 사이클베로드롬 경기장 등의 건립을 추진하였다. 부산은 국내 제2의 대도시로서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국가 발전의 중추 도시로서 크게 기여해 왔으나 대도시 성장 억제 정책에 묶여 도시 발전이 저해되고 산업 구조 개편에 따른 지역 경제 약화로 도시 발전 전략이 시급한 실정이었다. 이에 따라 새로운 국제화 시대의 주역이 될 21세기 환태평양 시대의 국제 교류 거점 해양 수도 부산을 건설하고자 하는 400만 시민의 열망으로 제2회 부산 동아시아 대회[1997. 5. 10~19]를 유치하여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또한 이를 계기로 제81회 전국 체육 대회[2000. 10. 12~18]와 제21회 전국 장애인 체육 대회[2001. 5. 9~11], 제30회 전국 소년 체육 대회[2001. 6. 2~5]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부산시는 아시안 게임의 리허설 성격으로 치러진 각종 대회의 성공적인 개회를 바탕으로 30억 아시아인의 축제인 2002년 제14회 부산 아시아드 경기 대회[2002. 9. 29~10. 14]와 2002년 제8회 부산 아·태 장애인 경기 대회[2002. 10. 26~11. 1]를 역대 가장 훌륭한 대회로 치러냄으로써 명실공히 부산 체육 발전은 물론 부산 시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체육 대회]

1. 전국 체육 대회

1) 제38회 전국 체육 대회

1957년 10월 18일부터 24일까지 7일간 부산에서 개최된 제38회 전국 체육 대회는 초·중·고·대·일반부 등의 24개 종목에 서울을 비롯한 10개 지방 단체별로 5,579명의 선수와 임원이 참가하였다. 부산에서 처음으로 개최된 제38회 대회는 체전 사상 전국 순회 개최의 효시가 되었고 재일본 동포 선수단이 해외 선수단으로는 처음으로 참가하였으며, 근대 매스 게임이 최초로 도입되고 보스턴 마라톤 우승자 서윤복 선수가 최종 성화 주자로 나서는 등 다양한 볼거리로 시민들의 관심을 모았다.

대회 개막일에는 개회식을 보기 위해 입장 시간 오후 2시를 5시간이나 앞둔 오전 9시부터 구덕 운동장[당시 명칭 부산 경기장]으로 인파가 몰리기 시작하여 수십 명의 기마 경찰들이 인파 정리에 땀을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2만 명 수용 규모의 경기장에 7만여 명이 동시에 밀어닥치는 과정에서 행사에 참여한 학생 2명이 입장객들에게 밟혀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곧이어 성화가 입장하는 2시쯤에는 육상 경기장의 심판대가 무너지는 사고로 학생 1명이 사망하고 5명이 중경상을 입는 참사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16개의 신기록을 수립하며 막을 내린 이 대회의 경기 결과 서울이 종합 1위를 차지하였고 행정 구역상 부산이 포함되어 있던 경상남도와 경상북도가 그 뒤를 이어 2, 3위에 올랐다.

2) 제54회 전국 체육 대회

제4차 중동 전쟁이 발발해 오일 쇼크의 불안이 전 세계를 짓누르던 1973년 10월 부산에서는 제54회 전국 체육 대회가 10월 12일부터 17일까지 6일간 개최되었다. 27개 종목에 1만 2873명이 참가한 이 대회는 제53회부터 소년 체전이 분리되어 중학부를 제외한 고, 대, 일반부로 나눠 경기가 진행되었다. 제47회 대회 이후 7년 동안 서울에서만 열려왔던 데다 1957년 이래 16년 만에 부산에서 개최되는 대회여서 10월 10일 부산역을 통해 개최지 부산에 도착한 각 시도 선수단은 부산역 광장을 메운 3만여 부산 시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당시로서는 거액인 6억여 원을 투입해 잔디를 입힌 구덕 운동장에서 열린 개회식에서 대통령 입장 15분 전인 오전 9시 45분쯤, 운동장 상공에 떠있던 애드벌룬에 매단 대형 태극기가 찢어져 관계자들을 긴장하게 했으나 한복으로 단장한 부산선화여상 학생들이 기지를 발휘해 가지고 있던 실과 바늘로 태극기를 꿰매 위기를 넘겼다.

이 대회는 유난히 화제가 만발한 대회였다. 20년간 전국 체전에 참가해 온 경남체육회의 박용준 이사가 병으로 이 대회에 참석할 수 없게 되자 그의 어머니가 경상남도 선수단에 격려금 5천원과 아들의 애달픈 사연을 담은 편지를 보내와 체전 참가자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경상북도 선수단 검도 팀의 신성군은 당시 75세의 나이로 출전해 화제가 됐으며, 배구 종목에서 전라남도 선수단은 여자 배구 대표로 쌍둥이 자매가 출전해 세간의 눈길을 모았다.

여고부 배구 경기장인 동성초등학교 체육관에선 당시 선풍적인 인기 탓에 400명 수용 규모의 관람석에 1,500여 명이 입장해 경기가 한때 중단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하였다. 역도 경기에서는 현역 국회 의원이 은메달을 따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올림픽 출전 3회를 포함하여 해외 원정 경기 경력 9회에, 당시까지 한국 신기록을 보유하고 있던 황호동 의원이 헤비급에서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 대회에서도 서울이 1970년 이래 3연패를 차지하였고 1963년 경상남도에서 분리된 부산이 통산 2번째 2위를, 경상북도는 전년도 3위 팀인 경기도를 제치고 3위를 차지하였다.

3) 제57회 전국 체육 대회

‘찬란한 슬기, 뭉친 기상, 치솟는 젊음’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제57회 대회가 부산항 개항 100주년을 기념해 1976년 10월 12일부터 17일까지 6일간 27개 종목에 1만 1,914명이 참가한 가운데 부산에서 개최되었다. 대회 성화 최종 주자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인 양정모, 선수 대표 선서는 역시 몬트리올 유도 동메달리스트인 조재기가 맡아 부산 체육의 위상을 드높였다. 그리고 재독일 선수단이 임원 17명과 선수 18명 규모로 처음 참가했으며, 캐나다 대표 팀은 임원도 없이 선수단 한 명으로 참가해 눈길을 모았다.

개회식장인 구덕 운동장에는 통금이 끝난 새벽 4시부터 인파가 몰리기 시작했으나 1957년 대회 때와는 달리 질서 정연하게 입장, 불미스러운 사고는 없었다. 특히 이 대회에서 경기도 육상 대표로 나온 김경숙[당시 19세, 삼성전자]이 여자 일반부 200, 400, 800m와 400, 1,600m 계주 등 5개 종목에서 우승을 해 한국 육상 사상 처음으로 여자 5관왕이 탄생했으며, 김경숙에게는 ‘그라운드의 마녀’라는 별명이 붙었다. 부산대학교 운동장에서 벌어진 럭비 풋볼 8강전에서는 경상남도 소속의 해군사관학교가 경기 규칙도 잘 모르고 출전한 전라북도 선발 팀을 30:0으로 완파하는 경기가 벌어지기도 했다.

제주도 배구 팀은 감독, 선수 모두가 부두에서 하역 작업을 하는 노무자들로 구성된 부두 노조 팀이어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특히 이 팀은 10년 전 사무실 앞 빈터에서 말목을 박고 네트 대신 그물로 배구장을 꾸며 출범한 이래 4년 전부터 제주도 내에서 열린 각종 대회에서 우승, 전국 체전 대표로 출전하기에 이르렀다. 이 팀의 운영비와 출전비 또한 노무자들 본인의 품삯으로 충당해 눈길을 끌었다. 대회 결과 서울이 6연패, 경기도가 2위, 경상북도가 3위를 차지했으며 개최지인 부산은 5위에 머물렀다.

4) 제67회 전국 체육 대회

1986년 제67회 전국 체육 대회는 10월 개최되던 관례를 깨고 4개월이나 앞당긴 6월 20일부터 25일까지 6일간 서울을 중심으로 경기도와 부산에서 34개 종목에 2만 191명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9월 서울에서 개최되는 제10회 아시아 경기 대회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예행연습을 겸해 치러진 이 대회는 ‘전국 체전 서울답게 86·88 주인답게’라는 캐치프레이즈처럼 개막식부터 화려함을 드러냈다.

국내 최초로 8만여 명의 관중이 펼친 ‘관중 스카프 섹션’은 종래의 카드 섹션이 가졌던 딱딱함을 지양하고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변화를 연출해 많은 박수를 받았으며 아시안 게임에 사용하기 위해 설치 비용 24억 원을 들인 컬러 전광판도 그 화려한 위용을 드러냈다. 이 대회는 아시안 게임에 대비해서 각 종목의 국가 대표들이 출전하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지만, 각종 행사나 경기 운영 방식을 아시안 게임과 동일하게 전산, 전자 장비를 비롯해 각종 경기용 기구를 활용하였다.

또한 시상식에도 메달 수여와 함께 각 시도의 기를 게양하는가 하면 지정곡도 연구하였다. 부산에서는 86 아시안 게임과 88 서울 올림픽 요트 경기에 대비해 새로 건립된 수영만 요트 경기장에서 요트 경기가 벌어졌다. 이 대회에서 경기도가 종합 우승을 차지했으며, 전라남도가 2위, 서울이 3위를 차지했다. 또한 1985년 3위를 차지했던 부산 선수단은 4위에 머물렀다.

5) 제81회 전국 체육 대회

제81회 부산 전국 체육 대회는 2000년 10월 12일부터 18일까지 7일간 ‘새 천년 새 출발 한민족 힘찬 도약’이라는 슬로건 아래 개막된 대회이다. 이 대회는 새 천년을 맞아 처음으로 개최되었다는 큰 의미 속에 한민족의 화합과 통일을 기원하고 2년 앞으로 다가온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과 아·태 장애인 경기 대회를 대비함은 물론, 전 시민의 저력을 한데 모아 부산 경제의 재도약을 이루는 계기를 마련코자 열심히 준비하였다. 또한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듯 400만 시민의 열정이 한데 어우러져 부산의 넉넉한 인정과 웅비하는 저력을 한껏 보여준 7일간의 한마당 대축제로 평가되었다.

특히 이 체전은 지방 자치 단체로서는 최초로 대북 교류 사업의 성사를 통한 역사적인 금강산 통일의 불 채화로 민족 화합과 통일 기원 체전으로 승화시켰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1,600명에 달하는 각계각층 시민들의 자원 봉사 활동이나 불편을 감수한 승용차 2부제 운행의 높은 참여율은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과 월드컵 및 아·태 장애인 경기 대회를 훌륭히 치러 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대회의 최종 결과는 경기도가 서울을 제치고 1위에 올랐으며 2위 서울, 3위는 부산이 차지하였다.

2. 부산 동아시아 대회

15억 동아시아인의 축제인 제2회 부산 동아시아 경기 대회가 1997년 5월 10일 오후 구덕 운동장 메인 스타디움에서 열렸다. ‘함께 여는 평화 제전, 하나 되는 동아시안’을 대회 구호로 동아시아인의 화합과 전진을 다짐한 이 대회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일본·대만·홍콩·마카오·몽골·카자흐스탄·괌 등 9개국에서 1,900여 명의 선수들이 참가, 열흘간 부산과 울산·창원 등 경상남도 일원의 16개 경기장에서 갈고 닦은 기량을 겨루었다.

개막식에는 김영삼 대통령과 여야당 대표 등 고위 인사 및 수많은 시민들이 참석해 화려한 식전 행사와 함께 대회 개막을 축하하였다. 이 대회에는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을 비롯해 30여 명의 각국 IOC 위원과 국제 스포츠를 움직이는 주요 인사들이 대거 참석하였으며, 취재와 보도를 위해 국내외 176개사에서 553명의 기자 및 4개국 11개 방송사의 보도·제작진 1,000여 명이 참가하였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화합과 전진의 대축전에 초청을 받은 북한이 끝내 불참했다는 것이다.

지방 자치 단체인 부산이 처음으로 주최하는 종합 국제 대회이자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의 리허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대회는 세계 스포츠 강국인 중국·일본·한국·대만 등이 참가해 육상·수영 등 14개 종목에서 199개의 금메달을 놓고 각축을 벌였다. 이 대회에 출전한 대표적 선수로는 한국 남녀 유도의 간판 전기영·조민선과 일본의 나카무라 형제, 체조의 여홍철[한국]·모후이란[중국], 역도의 잔 수강[중국]·첸수친[대만, 여], 수영의 아오야마 아야리[일본, 여] 등을 꼽을 수 있다. 중국 선수단의 우 쇼우장[吳壽章] 단장은 대회 시작 전부터 1회 대회 우승국답게 아시아 제일의 스포츠 강국다운 면모를 확실히 보여 주겠다는 결의를 보였다.

부산시와 부산동아시아대회조직위원회는 1995년부터 이 대회를 위해 착실히 대비해 왔으며, 따라서 차질 없이 각종 행사와 경기를 치러냈다. 주최 측은 대회 진행, 교통 문제, 선수단 숙소, 식음료, 통신, 프레스 센터, 문화 행사, 자원봉사자 활용 등에 전력을 기울였다. 특히 84세 노인부터 15세 학생까지 다양하게 구성된 3,080명의 자원봉사자들의 활동이 눈에 띄었으며, 친절하고 수준 높은 부산 시민 의식이 그것을 확실하게 뒷받침하였다. 이에 각국 선수와 임원, 관광객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한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돌아갔다. 부산 동아시아 대회는 스포츠 행사로서 뿐만 아니라 풍성한 볼거리, 다양한 먹을거리, 각국의 전통 놀이 등도 빼놓을 수 없다. 계절의 여왕 5월, 경기장의 열기와 문화 예술의 여유로움을 함께 제공함으로써 항도 부산을 찾는 동아시아인들의 축제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다.

3. 제8회 부산 아·태 장애인 경기 대회[FG]

제8회 부산 아·태 장애인 경기 대회가 2002년 10월 26일부터 11월 1일까지 7일 간 부산에서 개최되었다. 장애와 비장애의 벽을 넘어서며 끝없는 도전과 승리를 향한 집념을 통해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 부산 아·태 장애인 경기 대회는 스포츠를 통한 진정한 인류 화합의 무대를 만들며 40억 아시아·태평양 사람들을 하나로 결집하였다. 42개국에서 2,500여 명의 선수와 임원이 참가한 이 대회는 육상, 수영, 휠체어 농구, 양궁, 탁구, 역도, 휠체어 테니스 등 17개 종목에서 감동의 드라마를 연출하였다. ‘평등을 향한 힘찬 도전’이라는 이념 아래 화합과 우정, 사랑과 나눔, 청결과 친절을 목표로 치러진 대회는 장애인 스포츠의 발전과 국제적 해양 도시인 부산의 위상을 높였으며, 장애인에 대한 인식 개선과 복지 향상에 크게 기여하였다.

1998년 방콕 대회에서 종합 4위를 차지했던 한국은 제8회 부산 아·태 장애인 경기 대회에 선수 306명, 임원·지도자 121명 등 17개 전 종목에 427명의 선수단을 출전시켰다. 11월 1일 부산 아시아드 주경기장에서 폐막된 대회 마지막 날 경기인 론볼링에서 금 3, 은 2, 동 1개를 획득하고 휠체어 농구에서 은메달을 추가해 모두 금 62, 은 68, 동 60개를 획득하며 중국에 이어 종합 2위를 차지하였다.

중국은 금 191, 은 90, 동 50개로 종합 1위를 차지했으며 태국은 금 43, 은 48, 동 37개로 한국에 이어 종합 3위에 올랐다. 일본[금 33, 은 25, 동 25]과 홍콩[금 27, 은 15, 동 16]이 각각 4, 5위로 뒤를 이었다. 한국은 론볼링 여자 개인[B5]에 출전한 곽영숙이 금메달, 고숙미가 동메달을 획득했으며, 여자 개인[B6/7/8]에서도 이영숙, 장은주, 하두점이 금·은·동을 휩쓸었다. 남자 개인[B5]에서도 정진삼과 임수진이 각각 금·은메달을 추가했다.

휠체어 농구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호주를 연장전 끝에 극적으로 눌렀던 한국은 결승전에서 다시 만난 호주에게 체력과 전술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51:69로 패해 아쉽게 은메달에 머물렀다. 이 대회에는 수영에 출전한 중국의 허정관이 대회 최고인 6관왕에 오른 것을 비롯해 사격에 출전한 한국의 심재용 등 모두 8명의 선수가 5관왕을 차지했으며 4관왕도 11명이 나왔다. 세계 신기록도 육상과 수영 등에서 모두 19개나 쏟아져 기록상으로 풍성한 대회임을 입증하였다.

4. 제21회 전국 장애인 체육 대회

2001년 5월 9일부터 11일까지 ‘다함께 굳세게 끝까지’를 표방하며 장애인의 재활의식 고취 등을 목적으로 제21회 전국 장애인 체육 대회가 개최되었다. 부산 구덕 경기장에서 열린 육상 경기를 비롯해 17개 종목이 17개 체육관에서 펼쳐졌다. 이 대회에서 선수들은 2년 동안 쌓아온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였는데, 행사 주최는 전국장애인복지진흥회에서 맡았으며 여러 기관에서 주관 및 후원하였다. 참가 인원은 선수 1,500명, 임원 500명 등 총 2,000여 명에 달하였다. 5월 9일 개회식 전의 공개 행사로, 패러글라이더를 탄 장애인과 천사, 휠체어 에어로빅, 고적대 퍼레이드와 의장대 시범 등이 다채롭게 펼쳐졌으며, 특히 몸이 불편한 두 사람으로 구성된 패러글라이더 팀의 고공 시범은 놀라운 장면들을 연출하여 관중들로부터 많은 박수와 갈채를 받았다.

연 3일에 걸쳐 열띤 경기를 마친 뒤 5월 11일 폐회식을 가졌는데, 폐회식에는 김원길 보건복지부 장관을 비롯해 16개 시·도 선수단 등 1만여 명이 참석하였다. 폐회식 후 행사에는 선수와 임원, 시민들이 함께한 어울 마당 잔치가 열렸다. 한편 부산시 선수단은 이 대회에서 금 23개, 은 18개, 동 16개를 획득하며 경기 선수단[금 51, 은 40, 동 37], 서울 선수단[금 44, 은 42, 동 37]에 이어 메달 집계 3위를 차지했다. 부산은 대회 마지막 날 역도에서 5개의 무더기 금메달을 비롯해, 유도와 배드민턴에서 각각 1개 등 모두 7개의 금메달을 추가하며 막판 상위권으로 뛰어올랐다. 부산 선수단의 강영수[19], 송도행[21], 조원택[28]은 2관왕의 영광을 안았다.

5. 2002년 아시안 게임

2002년에 열린 제14회 부산 아시안 게임은 44개 OCA 전체 회원국 선수·임원 9,767명과 방송 보도진 6,406명이 참가한 대회로, 38개 경기 종목[골프, 공수도, 근대 5종, 농구, 당구, 럭비, 레슬링, 배구, 배드민턴, 보디빌딩, 복싱, 볼링, 사격, 사이클, 세팍타크로, 소프트볼, 수영, 스쿼시, 승마, 야구, 양궁, 역도, 요트, 우슈, 유도, 육상, 정구, 조정, 체조, 축구, 카누, 카바디, 탁구, 태권도, 테니스, 펜싱, 하키, 핸드볼]에 419개 세부 경기가 개최되었다. 이는 27개국, 25개 종목에 4,839명의 선수 임원이 참가한 86 서울 아시안 게임보다 2배 이상 크며, 서울 올림픽에 버금가는 역대 아시안 게임 사상 최대 규모였다.

제14회 부산 아시안 게임은 ‘희망과 도약, 새로운 아시아[New Vision New Asia]’를 대회 이념으로, ‘아시아를 하나로 부산을 세계로[One Asia Global Busan]’를 대회 표어로 정하였으며, 2002년 9월 29일 오후 6시 부산 아시아드 주경기장에서의 개막식을 시작으로 10월 14일 오후 7시 폐막식까지 16일간의 일정으로 이루어졌다. 경기는 부산시를 중심으로 인근 마산[복싱, 축구], 양산[레슬링, 스쿼시, 공수도, 축구], 울산[럭비, 탁구, 축구], 창원[핸드볼, 근대 5종(펜싱), 사격, 수영(수구), 축구]에서도 일부 경기가 개최되었다.

경기 면에서 한국 선수단은 아시안 게임 참가 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다. 애초 한국은 지난 1986년에 이어 두 번째로 국내에서 개최된 제14회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 38개 종목 중 카바디를 제외한 37개 종목에 1,007명[임원 238, 선수 769]을 출전시켜 금메달 80개 이상을 획득, 종합 2위를 목표로 세웠다. 그런데 한국 선수단은 1998년 방콕 대회[377개]보다 42개가 많은 419개의 금메달이 걸린 이 대회에서 전 종목의 고른 선전으로 예상을 크게 상회하는 금메달 96개, 은메달 80개, 동메달 84개를 획득하여 중국[금 150개]에 이어 종합 2위를 차지하였다. 금메달에서 일본을 무려 52개의 큰 차이로 제치고 아시아 스포츠 2인자의 자리를 확고히 했다.

6. 2002년 월드컵 대회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공동 개최한 2002년 월드컵 대회는 ‘새로운 천년, 새로운 만남, 새로운 출발’이라는 기치 아래 21세기 들어 처음으로 열린 전 세계인의 축구 대회였다. 국제축구연맹이 주최하고, 한·일월드컵축구대회조직위원회가 주관한 월드컵 대회는 한국과 일본 각 32경기씩 모두 64경기가 양국의 각 10개 도시, 모두 20곳에서 진행되었다. 부산은 한국 제2의 도시로서 월드컵 대회 한국 지역의 3경기를 배정받아 성공적으로 치러냈으며, 특히 월드컵 사상 첫 승을 갈구하는 한국 축구팀의 예선 첫 경기를 펼쳐 월드컵 4강 신화의 초석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부산에서는 2001년 12월 1일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월드컵 본선 조 추첨 행사를 유치하였다. 수만 명의 외국인이 부산을 방문한 가운데 월드컵 경기와 각종 문화 행사를 통해 명실상부한 ‘세계 속의 부산’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대회는 2002년 5월 31일에서 6월 30일까지 한국과 일본에서 개최되었다. 부산에서는 6월 2일[일] 16:30 파라과이 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기, 6월 4일[화] 20:30 한국과 폴란드의 경기, 6월 6일[목] 20:30 프랑스 대 우루과이의 본선 1차전 경기가 진행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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