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제1회 지방 선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3994
한자 第-回地方選擧
영어의미역 1st Busan Provincial Election
분야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강성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선거
관련인물/단체 자유당|국민회|한국청년단|김낙제|손영수
발생|시작시기/일시 1952년 4월 25일연표보기 - 시·읍·면 의회 의원 선거 실시
발생|시작시기/일시 1952년 5월 10일연표보기 - 도 의회 의원 선거 실시
종결 시기/일시 1952년 4월 25일 - 시·읍·면 의회 의원 선거 종결
종결 시기/일시 1952년 5월 10일 - 도 의회 의원 선거 종결
발생|시작 장소 부산광역시
종결 장소 부산광역시

[정의]

1952년 부산 지역에서 실시된 지방 선거.

[개설]

1952년 4월 25일에 실시된 시·읍·면 의회 의원 선거와 5월 10일에 실시된 도 의회 의원 선거를 말한다.

[선거의 정국]

제헌 의회의 지지를 바탕으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이승만(李承晩)은 지방 자치의 실시를 시기상조로 보았다. 남북 간의 대립 속에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강행했던 그로서는 확고한 국가 기반을 마련하고, 남북을 다시 통일하는 것이 최우선적인 과제였다. 하지만 권력 분점을 원하는 국회와의 갈등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지방 선거의 실시는 상당한 정치적 부담이 되었다. 이에 1949년 7월 4일 제정·공포된 「지방 자치법」을 같은 해 12월 15일에 개정하여 지방 의회의 구성을 유보하고, 내무장관과 도지사가 지방 의회의 기능을 대신하도록 하였다.

1950년 5월 30일에 실시된 제2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제헌 국회 의원 선거에 불참하였던 남북 협상파와 중도파가 대거 출마하여 당선됨으로써 이승만과 국회의 갈등은 더욱 커져 갔다. 이에 이승만은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방식으로는 재선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안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1952년 1월 18일 국회가 이를 부결하고, 오히려 재적 의원 2/3에 가까운 122명이 내각 책임제 개헌안을 제출[4월 17일]하였다.

이에 정부는 ‘관제 민의(官製民意)’를 동원하여 대통령 직선제가 민주적 원칙에 더 부합됨에도 불구하고 직선제 개헌안을 부결시킨 국회의 해산을 요구하며 압박하였다. 이와 병행하여 국회, 즉 중앙에서 자신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실패한 이승만은 자신의 입장을 지지해줄 전국적인 세력 기반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지방 의회의 구성을 생각해 내었다. 국내외 정세의 불안정과 치안 유지를 이유로 지방 의회의 구성을 연기해 오던 정부가 전쟁 중에, 그것도 피난에 의한 임시 수도 부산에서 지방 의회 구성을 위한 지방 선거 실시를 공포하였던 것이다.

[지방 선거 결과]

1952년 4월 25일,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지방 의회 의원을 선출하는 지방 선거가 실시되었다. 비록 한강 이북의 미수복 지역과 계엄령이 선포된 전라북도 관내의 지리산 인근 8개 면의 선거는 연기되었지만, 전국 17개 시, 72개 읍, 1,308개 면에서 선거가 실시되었다. 총 753만 6304명의 선거인 중에서 683만 6734명이 투표에 참가하여 91%라는 높은 투표율을 기록하였다. 투표 결과 시 의원 378명, 읍 의원 1,115명, 면 의원 1만 6051명이 각각 당선되었다.

이번 선거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선거인 수[명부 등재자 수]가 전체 인구의 42%에 불과했다는 점인데, 이는 전쟁으로 인한 인구의 유동과 군 복무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둘째 투표율은 상당히 높은 편이었는데, 시[80%]보다는 읍[88%]이, 읍보다는 면[93%]이 높게 나타났다. 셋째 무소속 당선자가 42.5%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지만, 이승만 정부는 자유당을 비롯하여 친여(親與) 성향의 한청·국민회·노청 등을 합해 56.6%로 과반수 이상의 당선자를 확보하였다.

넷째 무투표 당선자가 3,399명으로 전체의 19%에 이를 정도로 많았다는 점이다. 무투표 당선자는 시 의회 의원 4명, 읍 의회 의원 80명, 면 의회 의원 3,315명 등으로 도시보다 농촌 지역으로 갈수록 많았다. 특히, 전라남도는 전체 당선자의 63%가 무투표로 당선된 반면, 경상북도와 충청북도는 각각 3%와 4%에 그쳐 상대적으로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1952년 5월 10일에는 광역 의회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역시 서울특별시와 경기도, 강원도가 제외되었고, 전라북도의 남원·순창·완주·정읍 4개 군은 치안 관계로 선거를 연기한 채 전국 7개 도에서 선거가 실시되었다. 총 635만 8383명의 선거인 중 516만 5226명이 투표에 참가하여 81%의 투표율을 기록하였다. 306명의 의원 정수에 824명이 입후보하여 평균 2.7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선거 결과, 자유당이 147명의 당선자를 확보하여 전체의 48.0%를 차지하였고, 친여 성향인 국민회와 한청·노총 등을 합칠 경우 70.3%에 이르렀지만, 야당인 민국당은 4명을 당선시키는 데 그쳤다. 다만 경상북도와 경상남도의 경우 무소속 당선자가 각각 25명이나 되어 자유당을 어느 정도 견제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부산의 제1회 지방 선거]

먼저 실시된 부산시 의회 선거는 9개 선거구에서 35명[1선거구 3명, 2선거구 1명, 3선거구 6명, 4선거구 6명, 5선거구 6명, 6선거구 7명, 7선거구 1명, 8선거구 2명, 9선거구 3명]의 의원들을 선출하였다. 선거인 수는 34만 3005명이었고, 그 중 27만 2735명이 투표하여 투표율은 79.5%를 기록하였다. 입후보자는 모두 133명으로 3.8대 1의 경쟁률을 나타내었고, 단독 출마에 의한 무투표 당선자는 없었다.

투표 결과, 이승만 지지 세력인 자유당과 국민회가 각각 4명과 5명의 후보를 당선시켰으며, 한국청년단 2명을 제외한 나머지 24명의 의원들은 모두 무소속이었다. 지방 선거에서 당선된 의원들은 1952년 5월 5일 첫 회의를 열어 초대 부산시 의회 의장으로 김낙제를 선출하고, 시 의회에서 간선하는 초대 민선 시장으로 관료 출신인 손영수(孫永壽)를 선출하였다. 뒤이어 실시된 경상남도 의회 의원 선거에서는 선거인 수 34만 7131명 중 21만 8855명이 투표하여 투표율은 63.0%를 기록하였다. 부산의 6개 선거구에서 9명[1선거구 1명, 2선거구 2명, 3선거구 2명, 4선거구 1명, 5선거구 2명, 6선거구 1명]의 도 의원을 선출하였는데, 자유당 4명, 무소속 5명이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