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10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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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錦陽- |
영어의미역 | Geumyang Village |
이칭/별칭 | 공수물 마을,금양리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곡동 금양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송진모 |
성격 | 자연 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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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시기|일시 | 1740년 - 동래군 북면 부곡리에 포함 |
변천 시기|일시 | 1914년 - 경상남도 동래군 북면 부곡리 |
변천 시기|일시 | 1936년 - 경상남도 동래군 북면 부곡리에서 부산부 부곡동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42년 - 부산부 부곡동에서 부산부 동래출장소 부곡동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57년 - 부산부 동래출장소 부곡동에서 부산시 동래구 부곡동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63년 - 부산시 동래구 부곡동에서 부산직할시 동래구 부곡동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88년 - 부산직할시 동래구 부곡동에서 부산직할시 금정구 부곡동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95년 - 부산직할시 금정구 부곡동에서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곡동으로 개편 |
자연 마을 | 금양 마을 -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곡동 금양 마을 |
[정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곡동에 있는 자연 마을.
[명칭 유래]
금양(錦陽) 마을의 옛 이름은 공수물 마을이다. 공수물이라는 이름은 동래부의 공수물을 조달하는 공수전(公須田)이 있었기에 붙여졌다. 대한제국 시기 행정 구역 개편 때 공수물을 금양동(錦陽洞)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양지바른 곳에서 품질 좋은 누에고치로 비단을 생산하여 공물로 보냈다는 의미로 추정된다.
[형성 및 변천]
금양 마을은 황산도의 경유지로, 『동래부지(東萊府誌)』[1740] 관사조에 “1626년(인조 4) 부사 유대화(柳大華)에 의해 지어진 공수청[공수물을 담당하는 관청]이 동헌인 충신당 남쪽에 11칸 규모로 있다.”는 것과 이곳을 동래부 북면 부곡리로 칭하는 것에서 마을의 형성 시기를 1600년대로 추정할 수 있다.
대한제국 시기 행정 개편 때[1896년경] 공수물 마을이 금양리(錦陽里)로 되었으며,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1904]에는 북면 관내 금양동에 박씨(朴氏) 1호, 김씨(金氏) 1호, 송씨(宋氏) 2호, 양씨(梁氏) 2호, 공씨(孔氏) 2호, 문씨(文氏) 1호 등 9호가 거주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 중 송씨가 1600년경의 금양 마을 입향조로 알려져 있다.
1905년경 금양 마을에는 17가구가 살았고, 범어천 둑 모래밭에 일본군 2개 중대가 주둔하고 있었다고 한다. 1914년 동래군 북면 부곡리로 개칭하였다가, 1936년 부산부 부곡동, 1957년 부산시 동래구 부곡동이 되었다. 1988년 1월 1일부로 동래구에서 분구되어 금정구의 관할이 되었다.
1970년대 준공업 지역으로 설정되면서 범어천 둑 모래밭인 불모지에 공장이 들어섰다. 태창모직, 반도상사, 경남섬유 등 30여 개 기업에 종사원 2,500여 명이 유입되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상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1990년 중반부터 기업의 외곽 이전으로 아파트가 조성되기 시작하면서, 태창모직 자리에 대우 아파트, 반도상사 자리에 우신 아파트, 경남섬유 자리에 경남 아파트·한신 아파트가 들어서 대단위 주거지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자연 환경]
금양 마을 동쪽에 윤산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범어천[온천천]이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 범어천의 양쪽 둑은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모래밭 불모지였으나 현재는 주거지로 이용되며, 범어천은 생태 하천으로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현황]
도시화의 결과 금양 마을은 과거 자연 마을의 흔적은 대부분 사라졌고, 현재는 지명에서만 흔적이 남겨져 있다. 부곡 2동 주민자치센터, 금정세무서, 부곡2파출소 등이 있으며, 대동대학,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금양중학교, 부곡중학교, 부곡초등학교, 현곡초등학교 등이 있다. 공수물 소공원 내에는 노포동에서 옮겨 온 부사 민영훈 거사비 등이 있다. 윤산 기슭에는 체육공원이 들어서 있으며, 마을 당산 나무[팽나무로 수령 300년가량임]가 부곡 2동 주민자치센터 앞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