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497 |
---|---|
한자 | 東萊縣 |
영어의미역 | Dongnae-hye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금정구|해운대구|남구|수영구|연제구 |
시대 | 고려/고려,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정희 |
[정의]
고려 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부산광역시에 있던 지방 행정 구역.
[개설]
거칠산국(居柒山國)이 동래(東萊)로 개명된 때는 757년(경덕왕 16) 지방 제도 명칭을 한자식으로 고친 데서 비롯되었다. 이때 세 가지 방법이 사용되었다. 첫째 토속적인 재래의 이름은 그 소리를 따라 한자로 음역한 음역식(音譯式)으로 고친 것, 둘째 그 의미를 한역(漢譯)하여 쓴 훈독식(訓讀式)으로 고친 것, 셋째 그 지방의 특수성이나 특산물, 기타 특수한 유래에 따라 개명한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동래의 명칭 유래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변진(弁辰)조에는 삼한 시대 24개의 국명(國名) 중 독로국(瀆盧國)이 기록되어 있다. 독로국이 ‘독로→ 동네→ 동래’로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삼한 시대 동래군은 거칠산국이었다고 한다. 거칠산은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 뒷산인 황령산의 우리말인 ‘거친 뫼’와 의미가 통하므로 여기에서 유래되었다고 본다. 셋째, 지방의 특수성과 관련한 것으로 동방에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蓬萊山)에서 연유한다는 것이다. 즉 ‘동래’는 서복(徐福)[서불]이 불로초를 구하러 동해로 떠난 동쪽에 있는 ‘봉래’산의 음역이라는 것이다. 또 동래의 주산인 장산(萇山)이 동래의 옛 이름이 ‘봉래’라는 점도 봉래산에서 동래를 유추할 수 있다고 한다.
[관련 기록]
동래와 관련된 기사로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4 지리지에 “동래군은 본래 거칠산국이었는데 경덕왕 때 동래군으로 고쳐 지금도 이를 따르고 있다. 영현(領縣)이 둘이다”라고 하여 동래 지명의 유래를 알려 주고 있다. 이 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3 동래현조의 “옛 장산국이다[혹은 내산국이라고도 한다]. 신라가 점유하고는 거칠산군을 두었는데,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는 기사도 지명 유래에 참고가 된다. 『고려사(高麗史)』 권57 지리2 울주(蔚州)조의 기사는 “속현이 둘 있는데, 동래현과 헌양현이다”라 하여 동래군이 현으로 바뀌었고 울주[울산]의 속현이 되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변천]
동래현은 757년 이후 줄곧 동래군이었는데, 고려 건국 이후 속현이 되는 과정에서 동래현이 되었다. 그 형성 시기는 고려 지방 제도가 완비된 1018년(현종 9)이었다. 이후 동래현은 현령이 파견되어 속현에서 벗어났는데, 그 정확한 시기는 이 지역 토착 세력이던 동래 정씨(東萊鄭氏)의 중앙 진출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정서(鄭敍)의 할아버지인 정목(鄭穆)은 1072년(문종 26) 과거에 급제하여 정3품의 관직에 올랐고, 정항(鄭抗)은 1102년(숙종 7) 과거에 급제하여 숙종 옹립의 1등 공신인 왕국모(王國髦)의 딸과 혼인하였을 정도로 명문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따라서 현종 이후 늦어도 숙종 연간[1096~1105] 이전 독립 군현으로 승격하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군현의 내속 관계를 재조정한 1062년(문종 16) 대일 가능성이 높다. 이후 동래현은 일본과 대치하는 국방의 요새지로 부각되면서 위상이 높아져 1547년(명종 2) 동래부로 자리매김할 때까지 동래현의 명칭은 지속되었다.
[의의와 평가]
동래현은 고려 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지속된 부산 지역 행정 구역으로, 부산 지역 지방 행정 변천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