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431 |
---|---|
한자 | 古墳 |
영어의미역 | Ancient Tomb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선사/석기,선사/청동기,고대/삼국 시대,고대/남북국 시대,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홍보식 |
[정의]
부산 지역에 분포하는 신석기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다양한 무덤.
[개설]
고분(古墳)은 주검을 안치한 매장 시설을 일컫는 용어로서 묘(墓)·분(墳)·분묘(墳墓) 등 다양하게 불리고 있다. 묘란 대개 주검을 안치한 외피 시설로, 후세에 남기고자 한 의도에서 만든 기념물이자 모든 시대와 지역에서 만든 무덤을 가리키며, 분봉(墳封)이 없는 무덤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 묘 주인공의 생전 신분이나 계급·관직 등에 기준을 두거나 무덤의 상대적 크기에 의해 대형 묘·중형 묘·소형 묘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와 달리 고분은 위치·규모·부장품의 질과 양 등 매장 시설의 여러 요소에서 지배와 피지배의 정치 관계가 반영된 시대 또는 시기에 조영된 묘를 가리킨다. 이외에도 어느 시대 또는 시기에 조영된 무덤을 묘로 구분하여 역사성을 부여하여 부르는 경우도 있다.
[신석기 시대의 고분]
부산 지역에 인간이 생활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발굴 성과로 보면 후기 구석기 시대부터이다. 그러나 아직 이들의 무덤은 밝혀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부산 지역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의 무덤은 범방동 패총과 가덕도 신석기 유적에서 확인되었다. 범방동 패총은 신석기 시대 전 기간에 걸쳐 형성된 유적이며, 무덤은 신석기 시대 전기에 해당되는 덧무늬 토기 문화층 아래에 별다른 시설 없이 굴장된 모습으로 매장되었다. 패총에 무덤이 있다는 것은 이 시대에는 아직까지 주거와 무덤이 공존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가덕도 신석기 유적에서는 48기의 무덤이 조사되었다. 무덤의 구조는 땅을 얕게 파서 만든 구덩이에 주검을 안치한 움무덤으로 추정되고, 주검을 옆으로 눕힌 측와장[3기], 반듯하게 눕혀 매장한 신전장[5기], 다리를 구부려 매장한 굴장[20기] 등이 확인되었다. 부장품으로는 인골 주위 또는 인골 위에 토기류와 돌도끼·조개 팔찌·붉은색 안료·옥 꾸미개·상어 이빨로 만든 꾸미개 등이 출토되었다. 가덕도 장항 마을에 있는 가덕도 신석기 유적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의 분묘 유적 중 규모가 가장 클 뿐만 아니라 다양한 매장 형태와 각종 부장품이 있어 신석기 시대의 사회 구조와 묘제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청동기 시대의 고분]
청동기 시대의 무덤으로는 고인돌이나 돌널무덤이 약간 알려져 있다. 부산의 가장 대표적인 고인돌군은 미음동 분절 고인돌이다. 강서구 미음동에 있는 미음동 분절 고인돌에서는 해안가에 형성된 구릉 말단에서 모두 11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무덤을 알리는 상석은 모두 없고, 하부 구조만 남아 있었다.
대부분의 고인돌은 주검과 부장품이 안치된 무덤 주위에 방형 또는 원형으로 돌을 돌리고 그 안에 돌을 깔아 구획하였다. 무덤은 깊은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돌로 관을 짜 맞추고, 주검과 부장품을 묻은 뒤 여러 겹의 뚜껑돌을 덮은 다음 지상에 돌을 깔았다. 구획묘의 일부는 구획의 바깥에 도랑을 파고, 그 안에 민무늬 토기를 깨트려 매납하였다. 구획묘의 주위에는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주검과 부장품을 넣어 매장한 움무덤도 확인되었다. 대부분의 무덤에서 석검과 석촉 등의 석기와 붉은 간 토기가 부장품으로 출토되었다. 미음돌 분절 고인돌은 낙동강 서안의 가장 시기가 늦은 무덤으로서 기원전 4~기원전 3세기에 조영되었다.
[삼한 시대의 고분]
삼한 시대의 무덤으로는 금정구에 있는 노포동 유적과 구서동 유적, 동래구에 있는 온천동 유적과 부산 복천동 고분군, 정관읍에 있는 방곡리 유적 등에서 널무덤과 덧널무덤, 독무덤 등이 확인되었다. 노포동 유적에서 확인된 무덤은 널무덤, 덧널무덤, 독무덤 등이다. 널무덤은 1기가 발견되었는데, 훼손이 심해 남아 있는 상태가 좋지 않다. 평면 형태는 세장방형이고, 묘광과 목관 사이의 충전토에 유물을 부장하였다. 무덤의 시기는 기원전 1세기 전반이다.
동래구 온천동 금강 공원에 있는 온천동 유적에서는 5기의 널무덤이 확인되었다. 5기 모두 통나무 목관을 사용하고 그 위에 돌을 쌓은 돌무지 널무덤이다. 충전토와 봉토에서 민무늬 토기와 와질 토기(瓦質土器), 철검·쇠투겁창·쇠솥·철사 등 다양한 철기류가 출토되어 기원전·후 시기 부산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구명할 수 있는 정보가 획득되었다. 삼한 시대 후기의 무덤 유적으로는 노포동 유적에 있는 덧널무덤이 알려져 있다.
[삼국 시대의 고분]
삼국 시대의 무덤은 매우 조밀하게 남아 있고, 비교적 많은 유적이 조사되었다. 또한 고분군을 구성하는 개별 고분의 구조와 규모가 다양하고 그곳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종류와 형태, 그리고 재질도 다양하다. 지금까지 조사된 고분군으로는 부산 복천동 고분군·노포동 유적·부산 오륜대 고분·두구동 임석 고분군·당감동 고분군·화명동 고분군·덕천동 고분군·반여동 고분군·괴정동 고분군·연산동 고분군·좌동 구석기 유적·지사동 분절 고분군·구랑동 고분군·생곡동 가달 고분군·청강리 고분군·두명리 고분군·용수리 가동 고분군 등이 있다. 이외에도 아직 조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노포동 작장 고분군·하정 고분군·초장동 고분군·두구동 고분군·성북동 고분군 등이 알려져 있다. 이들 고분군에서 현재까지 확인된 매장 구조로는 덧널무덤·구덩식 돌덧널무덤·앞트기식 돌방무덤 등이 있으며, 굴식 돌발무덤은 아직 1기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삼국 시대 부산 지역의 중심 고분군은 부산 복천동 고분군과 연제구에 있는 연산동 고분군이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은 기원전·후부터 7세기 전반까지 조영되었고, 3세기부터 5세기 전반까지 큰 무덤이 많이 조영되어 무덤 조영의 중심 시기이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 확인된 무덤의 종류는 널무덤·덧널무덤·구덩식 돌덧널무덤·앞트기식 돌방무덤·독무덤이고, 그 중에서 덧널무덤과 구덩식 돌덧널무덤이 대부분이다. 연산동 고분군은 5세기 후반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고, 흙으로 큰 분구를 만든 고총 고분이 구릉 능선을 따라 18기가 배치되었고, 구릉 사면에는 1,000여 기 이상의 중·소형 무덤들이 배치되었다. 연산동 고분군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까지 부산 지역 지배층의 묘역이었다.
[통일 신라 시대의 고분]
통일 신라 시대의 무덤도 부산 각지에서 확인되지만, 큰 규모의 무덤은 확인되지 않았고, 또 많은 무덤이 한 곳에 모여 있지 않고 4~5기씩 무리를 이루고 있다. 지금까지 조사된 부산 지역의 통일 신라 시대의 무덤은 덕천동 고분군, 노포동 작장 고분군, 부산 오륜대 고분, 반여동 고분군, 청강리 고분군, 교리 고분군, 명례리 고분군, 기장 월드컵 빌리지 조성 지역의 고분군, 연산동 고분군 등이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조사된 대부분의 무덤은 통일신라 초기에 해당하고, 통일 신라 후기의 것은 확인되지 않았다.
[고려 및 조선 시대의 고분]
고려 및 조선 시대의 무덤은 부산 각지에 분포하지만, 조사된 유적은 많지 않다. 지금까지 조사된 고려 및 조선 시대의 무덤은 덕천동 고분군, 화명동 고분군, 연산동 고분군, 교리 고분군, 청강리 고분군, 방곡리 고분군 등이 조사되었다. 무덤은 장방형의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판재로 만든 목관 안에 주검과 간단한 부장품을 넣은 널무덤 또는 목관을 설치하지 않고 주검과 부장품을 넣은 움무덤이다. 무덤의 부장품으로는 1~2점의 도자기와 숟가락·젓가락·청동합을 부장하였고, 일부 무덤에는 귀걸이·목걸이·발찌 등의 장신구도 부장하였다.
[의의와 평가]
고분은 당시의 토목 기술은 물론 물품 부장·순장·혼백(魂魄)의 관념과 내세관 등의 사상을 유추하고, 지역과 집단·종족 등의 차이와 관계는 물론 당시의 사회적 관계 등을 유추할 수 있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있다. 그리고 매납된 유물의 구성과 양 등을 통해 고분을 조영한 해당 시기 집단의 여러 사회적 관계와 내용을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서의 가치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