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7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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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鎭奭 |
영어음역 | Yi Jinseok |
이칭/별칭 | 이규환(李圭環)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선화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이진석(李鎭奭)[1886~1970]은 1886년 8월 21일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에서 태어났다. 다른 이름은 이규환(李圭環)이다.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 명지면의 사립동명학교(私立東鳴學校)에서 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서울 등 각지에서 일어난 3·1 운동 소식을 접하는 가운데 동창인 경성약학전문학교 학생 김연복(金淵輻)으로부터 독립 선언서를 입수하게 되었다. 이진석은 동창생인 양왕석(梁旺錫)·김영두(金榮斗)·이규회(李圭恢)·지봉구(池鳳九) 등과 만나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이들은 시위 일자를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명호 시장 장날인 4월 10일로 결정하고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4월 9일 밤 양왕석과 함께 철야 작업으로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 선언서를 복사하였다.
4월 10일 이진석은 동지들과 사립동명학교 학생들을 명호 시장으로 비밀리에 부르고 장꾼이 많이 모인 오후 2시경에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이진석이 태극기를 장대에 높이 달고 독립 만세를 선창하면서 시위가 전개되었다. 시위 소식을 들은 일본군 헌병들이 출동하여 총검으로 군중을 해산시키자 시위 주동자들은 다음날을 기약하고 일단 피신하였다.
이들은 4월 11일 오후 10시 다시 학생과 주민을 동원하여 진목리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 이후 일본 경찰은 시위 가담자를 대대적으로 검거하여, 주동자인 이진석·양왕석·이규회·박두성(朴斗成)·정소목(鄭小穆)·김영두·지봉구 7명이 모두 검거되었다. 이진석은 징역 2년의 옥고를 치루고 석방되었다. 1970년 7월 12일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