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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한 순난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321
한자 梁潮漢殉難碑
영어의미역 Stone Monument for the Sufferings of Yang Johan
이칭/별칭 양공조한 순난비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동래시장길 27[복천동 229-78]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정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보수|복원 시기/일시 1767년연표보기 - 이설
보수|복원 시기/일시 2005년연표보기 - 보수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555년연표보기 - 양조한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592년 4월 15일연표보기 - 양조한 사망
관련 사항 시기/일시 1736년 - 양조한 호조 정랑에 추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2년 6월 26일 -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된 송공단의 부속 단비
현 소재지 송공단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229-78지도보기
성격 비|순난비
관련인물 비|순난비
재질 비|순난비
크기 비|순난비
소유자 비|순난비
관리자 비|순난비
문화재 지정번호 부산광역시 기념물

[정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송공단에 있는 조선 후기 양조한(梁潮漢)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개설]

양조한[1555~1592]은 동래부 부곡리(釜谷里) 사람이며, 젊어서 동래 향교에 입학하여 문덕겸(文德謙)과 친한 사이이었다. 노개방(盧蓋邦)이 동래 향교 교수로 있을 때 두 사람이 항상 가서 그를 따라서 경사(經史)를 강론(講論)하였는데, 그 학문이 행의(行義)를 먼저 하였고, 성품이 또 강개하여 절의(節義)로써 스스로를 허락하였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4월 14일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외적들이 동래로 쳐들어왔을 때 노개방 교수는 휴가를 얻어 어머니를 뵙고자 밀양에 가고 자리를 비웠다. 그러므로 양조한문덕겸과 의논하여 동래 향교 대성전에 모셔져 있던 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의 위패는 동래읍성 안의 정원루(靖遠樓)에 옮기기로 하고, 나머지 위패는 땅에 묻었다. 양조한문덕겸이 공자 등의 위패를 정원루에 옮겨 지키고 있을 때 밀양에서 노개방이 돌아와서 같이 지켰다.

다음 날 외적이 동래읍성을 쳐들어왔으나, 양조한노개방·문덕겸과 함께 공자 등의 위패를 지키고 있다가 먼저 순절하였고, 노개방문덕겸도 지키고 있던 위패를 묻고 죽임을 당하였다. 이러한 양조한의 순절 사실은 당시 13세이던 그의 손자 양부하(梁敷河)가 직접 보았으나,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가서 19년 만에 돌아오게 되어 잘 알려지지 않았고, 창녕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의병 활동 중 순절한 그의 동생인 양통한(梁通漢)으로 잘못 기록되어 전해졌다.

1735년(영조 11) 동래 부사 최명상(崔命相)의 보고 등을 통해 순절 사실이 바르게 알려져 다음 해에 양조한에게 호조 정랑(戶曹正郞)이 추증되었고, 1766년(영조 42) 송공단에 모셔졌다. 양조한은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당시 동래부 지역 안에서 순절한 선열 등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동래 충렬사에 모셔졌고, 1839년(헌종 5) 건립된 동래부 반송 삼절사(盤松三絶祠)에도 모셔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건립 경위]

임진왜란 때 동래읍성 안의 정원루에서 노개방·문덕겸과 함께 공자 등의 위패를 지키고 있다가 순절한 양조한은 1668년(현종 9) 민정중(閔鼎重)이 쓴 『임진 동래 유사(壬辰東萊遺事)』 등에 그의 동생인 양통한으로 잘못 기록되어 오랫동안 정부는 물론, 후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이런 논란은 1765년(영조 41) 양조한의 7세손 양운구(梁雲構)가 세 차례 소장(訴狀)을 올리고, 동래 사람들의 청원에 따라 1766년 4월 초에 최종 결론이 났다. 양조한 순난비(梁潮漢殉難碑)는 그해 4월 15일부터 송공단에 모시고 제사 지낼 때 건립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때 양조한문덕겸, 비장(裨將) 송봉수·김희수와 함께 서쪽 1단에 모셔졌다. 1767년(영조 43) 송공단을 다시 고쳐 쌓아 임진왜란 때 동래읍성에서 순절한 사람만을 모시게 될 때도 서쪽 1단에 모셔졌다.

[위치]

양조한 순난비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229-78번지 일원에 있는 송공단 안에 있다.

[형태]

문덕겸, 양조한, 비장(裨將) 송봉수, 김희수의 순난비가 나란히 세워진 송공단의 서쪽 1단은 가로 346㎝, 세로 91㎝, 높이 74㎝ 크기의 직육면체이고, 단 위에 사각형의 좌대(座臺)를 놓고, 그 위에 화강암으로 만든 비의 몸돌만을 얹었다. 몸돌의 머리는 반원형으로 다듬어져 있고, 크기는 높이 78㎝, 너비 29㎝, 두께 12㎝이다.

[금석문]

비석에는 ‘양공 조한 순난비(梁公朝漢殉難碑)’라고 새겨져 있다. ‘조(朝)’는 ‘조(潮)’의 잘못이다.

[현황]

양조한 순난비는 서쪽에 있는 문덕겸 순난비(文德謙殉難碑)와 동쪽 정단에 있는 송상현 순절비(宋象賢殉節碑)를 비롯하여 송공단에 있는 7단 15기 비석 등과 함께 소유자인 부산광역시 동래구에서 보존·관리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선 시대와 다르게 배치된 채 있다가 2005년에 1767년 당시와 같이 바로잡아 오늘날에 이른다.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된 송공단의 부속 단비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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