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3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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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選 |
영어음역 | Yi Seon |
이칭/별칭 | 택지(擇之),지호(芝湖),소백산인(小白山人)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곰내길 245-7[웅천리 42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엄경흠 |
[정의]
조선 후기 기장에 유배된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택지(擇之), 호는 지호(芝湖)·소백산인(小白山人). 아버지는 우의정 이후원(李厚源)이다.
[활동 사항]
이선[李選)[1632~1692]은 1657년(효종 8) 진사가 되었다. 1664년(현종 5) 춘당대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에 올랐고, 예문관 봉교(奉敎), 사간원 정언(正言), 교리(校理), 이조 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673년(인조 15) 홍문관 응교(應敎)로 재임할 때 노산군(魯山君)[단종]의 묘소에 시제(時祭)하고, 계유정난[1453] 때 수양 대군(首陽大君)에게 피살된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신원(伸寃)[억울함을 풀어 줌]할 것을 상소하였다.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강화도에 보관 중인 『열성실록(列聖實錄)』을 보수할 것을 청하였다가 우의정 허적(許積)의 눈밖에 나 구성으로 귀양 갔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노산군의 묘에 수졸(守卒)을 두고 사시(四時)와 기일에 제수를 보내기를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노산군 부인의 무덤에도 수졸을 두고 제수를 청하여 역시 허락을 받았다. 1675년(숙종 1) 형조 참의로 재임 시 송시열(宋時烈)이 쫓겨나고 남인이 득세하자 사직하였다. 다시 개성 유수가 되어 정충신(鄭忠信) 등에게 시호를 내리고 자손을 관직에 등용할 것을 청하였다. 예조 참판일 때 사신으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뒤이어 이조 참판이 되었다.
1689년(숙종 15) 임금이 후궁인 소의 장씨(昭儀張氏)[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기장으로 유배되었다. 이선은 현 기장군 철마면 웅천리의 남평 문씨(南平文氏) 문상익(文尙翼)의 집에 기거하면서 집승정(集勝亭)과 유란헌(幽蘭軒)에서 소일하였다. 이때 『송강가사(松江歌辭)』를 비롯한 송강 정철(鄭澈)의 문집 일부를 재정리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런 연유로 집승정은 ‘유배를 와서 귀향살이의 근심을 달랠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의 수리정(愁離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학문과 저술]
송시열의 문인이다. 저서로 『지호집(芝湖集)』이 있으며, 편서로는 『황강 실기(黃岡實記)』·『시법 총기(諡法摠記)』 등이 있다. 『송강가사』[이선본]를 정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