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2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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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小任 |
영어음역 | Bak Soim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사암 마을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서용태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열녀.
[가계]
본관은 밀양(密陽). 남편은 윤규석(尹奎石)[1880~1933]으로, 김해사립녹명학교[현 녹명초등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을 지냈다.
[활동 사항]
박소임(朴小任)은 김해 녹산 사암 마을[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출신으로, 슬기롭고 민첩하며 몸가짐이 단정한, 부덕을 갖춘 여인이었다. 같은 마을에 살던 윤규석과 혼인하여서 시부모를 정성껏 섬기고 남편을 공경하며 화목한 가정을 이루었다. 이웃을 대할 때는 말과 행실이 공손하여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박소임의 남편 윤규석은 1909년(순종 3) 고향인 녹산 지역의 선각자들과 김해사립녹명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을 지냈고, 1920년 녹산 강성의숙(降星義塾)을 설립하여 초대 숙장을 맡았다. 1927년 개교한 녹산공립보통학교의 후원인과 유지 위원을 지내면서 녹산공영회를 조직하여 지역 사회의 번영에 힘썼다. 윤규석이 사회 활동을 활발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박소임의 내조가 큰 몫을 하였다.
박소임은 남편이 고치기 어려운 고질(痼疾)로 고생하자 여러 해 동안 온갖 약을 지어 올리며 정성을 다하였으나 차도가 없었다. 남편이 숨을 거두려 하자 박소임은 한 가닥 희망을 안고 칼로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그 살을 구워 먹였더니 남편이 살아났다. 박소임은 남 몰래 살을 도려낸 고통을 참으며 신음하다가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윤규석은 1933년에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당시 유림의 중요 조직이었던 공부자성적도 오륜행실중간소(孔夫子聖蹟圖五倫行實重刊所)에 박소임의 효성과 행실이 알려져 1924년 정려 포장(旌閭襃彰)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