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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전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055
한자 朝鮮時代-戰爭
영어의미역 Wars in the Joseon Dynast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강식

[정의]

조선 시대에 부산 지역에서 전개된 전쟁 양상.

[개설]

부산은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워 왜구(倭寇)의 침입을 자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 시대에 부산에서 발견되는 무기를 통해 전쟁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경우는 삼포 왜란과 임진왜란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은 조총(鳥銃)을 사용하여 조선 군민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이는 동래구 수안동 부산 도시 철도 4호선 공사 현장에서 발견된 해자(垓字)에 남아 있던 각종의 인골에 박힌 총상의 흔적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일본군은 칼도 상당히 우수한 것이었다.

[군사 제도]

조선 건국 이후에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부산에는 조선의 온건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왜구의 침입이 줄어들지 않았다. 특히 왜구의 본거지인 쓰시마 섬[對馬島]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부산은 국방과 외교의 최전선이었다. 그리고 대일 온건 정책에 따라 설치된 일본인들의 거류지였던 왜관에는 일본인들이 항상 거주하고 있어서 각종의 정보가 노출되었다. 이에 1397년(태조 6) 부산포에 진(鎭)을 설치하였고, 임진왜란 이전에는 울산 개운포에 있던 수영(水營)을 옮겨 와 국방의 요새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조선 전기에 부산은 행정적으로 경상도에 속한 동래가 중심이었다. 동래는 처음에 동래현이었지만, 일본과의 관계가 중시되어 동래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부산의 군사 체제는 지방 거점을 방어하는 진관 체제였다. 육군의 경우 동래는 울산 좌병영에 속한 경주 진관에 속하였으며, 동래 현감이 절제도위(節制都尉)로서 군사를 지휘하였다. 수군의 경우 수영의 좌수영 휘하에 속한 부산포 진관과 다대포 진관이 있었고, 그 아래에 해운포·두모포·포이포 만호영 등이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전 군사의 부족에 따라 방어 체계가 제승 방략 제제(制勝方略體制)로 바뀌었다.

왜구의 침입을 가장 먼저 막아야 하는 국방상의 요새인 부산에는 군사적 성격의 진성(鎭城)이 비교적 많이 축조되어 있었다. 또 군사와 행정적 기능을 가진 읍성, 유사시의 피난과 항전을 위해 쌓은 산성 등이 있었다. 특히 조선 시대에는 부산진성, 동래 읍성, 좌수영성, 해운포 영성, 서평포 진성, 다대포성, 가덕진성, 천성진성, 기장 읍성, 두모포 진성 등의 여러 성곽이 있었다.

통신 수단으로는 봉수(烽燧)가 비교적 잘 갖추어져 있었다. 조선 전기 부산의 봉수는 1425년(세종 7) 동래현의 석성 봉수, 황령산 봉수, 간비오 봉수, 기장현의 남산 봉수가 있었다. 이후 석성 봉수 대신 오해야 봉수가 신설되었고, 다대포에 응봉 봉수가 신설되었다. 이 봉수들은 주요 선로인 직봉, 보조 선로인 간봉의 남쪽 출발점으로서의 기능을 하였다.

[전투]

조선 시대 부산에서 일어난 전투는 다음과 같다. 첫째, 삼포 왜란 때 일본군은 부산포에 침입한 후 동래 속현인 동평현을 점령하였다. 기록을 살펴보면 왜적들은 범전리로 향하여 길가에 진을 쳤는데, 적의 수효는 거의 200명에 이르렀다. 적들은 네 패로 나누어 두 패는 우리 군사와 싸우고, 한 패는 서면으로 향하고 다른 한 패는 남면으로 향하여 민가에 나누어 들어가 불을 질렀다. 이때 동래 현령 윤인복(尹仁福)은 군사가 적어 대적하기 어렵다고 보아 퇴각하여 본진으로 들어와서 성곽 위에 군사를 늘어 세웠다.

그러자 왜적은 합병하여 곧장 성에 다다라 다시 다섯 패로 나누어 네 곳에 군사를 둔취(屯聚)하고, 한 패는 성 동문으로 돌입하였다. 우리 군사가 왜적 5∼6명을 사살하고 방패와 장검 등을 빼앗았다. 해가 질 무렵에야 적은 퇴각하여 남쪽 약 1.18㎞[3리]의 대교 갈림길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때 부산진 첨사 이우증(李友曾)이 살해되고, 군민 100여 명이 죽는 등 부산포의 피해가 가장 컸다.

둘째, 임진왜란으로 부산은 많은 전투를 경험하고 피해를 입었다. 임진왜란 때 부산은 첫 전투지였으며, 전쟁 중에도 일본군의 주둔지였기 때문이다. 실제 임진왜란부산진성 전투, 부산의 행정 중심지를 지키기 위한 동래 읍성 전투, 낙동강 하구의 요충을 지키기 위한 다대진성 전투가 격렬하게 전개되었으나 모두 조선의 패배로 끝났다. 그러나 해전에서는 이순신(李舜臣)의 수군이 부산포에 정박 중이던 일본 선박 100여 척을 부순 부산포 해전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전면전이 펼쳐진 부산에서의 조선군과 일본군의 전력을 군사와 무기 측면에서 비교 분석할 수 있다. 먼저 무기를 보면 조선군은 주로 활과 칼을 사용하였으며, 일본군은 조총을 사용하였다. 조선 전기 조선의 무기로는 활·칼·창·석노(石弩)·포·화전(火箭) 등이 있었으며, 화약 병기로는 임진왜란 이전부터 소형 화기와 대형 화포 종류가 있었다.

육지 전투에서는 일본군이 우위에 있었다. 반면 해전에서는 우리나라의 주력 함대인 판옥선과 돌격선 거북선이 있어서 일본의 안택선(安宅船)을 압도할 수 있었으며, 화포의 성능도 일본보다 우수해 해전에서 이길 수 있었다. 다음으로 군사는 조선의 경우 군역(軍役) 자원의 부족과 병역 기피로 정예한 군사가 부족하였지만, 일본은 전국 시대를 거치면서 조련된 정예 군사가 있어 비교 우위에 있었다. 실제 임진왜란 개전 때 일본군은 1만 8700명의 군사가 부산 앞바다로 침입해 왔으며, 이에 맞선 부산진성의 군사는 1,000명을 넘지 않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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