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2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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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惟政大師忠義碑 |
영어의미역 | Monumental Stone for Great Master Yujeong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새싹로 295[초읍동 43]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태영 |
[정의]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초읍동에 있는 조선 후기 임진왜란 승병장 유정 대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건립 경위]
유정 대사(惟政大師)는 부산에 주둔해 있던 적진을 찾아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만나 적정(賊情)을 탐지하면서, 조선의 보배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네 목이 우리 나라의 보배다”라고 답한 일이 있었다. 이 같은 유정 대사의 활약을 알리기 위해 1880년(고종 17) 여름 부산 첨사 임형준(任衡準)이 비를 세웠다.
[위치]
유정 대사 충의비(惟政大師忠義碑)는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초읍동 43번지에 있다.
[형태]
이수(螭首)는 비신(碑身)과 별개의 돌로 두껍게 제작하여 얹었으며 모양은 팔각지붕을 닮아 양끝이 위쪽으로 올라갔다. 이수의 윗부분은 위쪽으로 n자 식으로 돌출된 것이 두 개 있고 하대석이 있다. 비를 둘러싸고 비각이 세워져 있다.
[금석문]
비의 앞면에는 ‘유정대사 충의비(惟政大師忠義碑)’라 적혀 있고,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오호라, 임진년의 변고를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드높은 송운(松雲)이란 이름은 오랠수록 더욱 빛난다. 위급하고 어려울 때 승의병(僧義兵)을 일으킨 것은 필경 효와 충에서 근본을 추구하였던 것이고, 자비의 종교에서 도를 깨달은 것은 본래 경전과 역사서에 힘입었던 것이다.
세 차례나 호랑이 굴에 들어가 보배로운 적장의 머리를 얻고자 하였으며, 멀리 사나운 파도를 건너가 외로운 혼령들을 널리 구제하였다. 조선과 일본 두 나라가 서로 교린(交隣)하도록 하였으니 몇 천 년 지켜 나갈 조약을 미리 정해 놓았고, 온 하늘에 은혜 가득하니 수없는 생명들의 번식이 이것에 힘입었다. 옛일을 생각하여 벼슬자리에 있었던 것은 몸이 이미 깊은 총애를 받았기 때문이요, 상소문을 올려 사직을 요청한 것은 뜻이 부귀에 따라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야산에서 임금으로부터 내린 의약을 받고 사례하고, 죽음에 장차 순응하니, 상서로운 빛이 하늘을 비추었다.
밀양에 사우(祠宇)를 창건하여 성대한 제전(祭典)이 마련되니, 풍성(風聲)을 영구히 수립하였다. 네 곳의 진영을 축조하는 부역으로 부산성이 완성되고, 10년 동안의 공로 가운데 이곳이 가장 현저하다. 세월이 오래되어 지나간 자취는 아득하고, 흘러간 시간은 돌아볼 겨를 없으니, 사라지지 않도록 이 돌에 새겨 둔다. 당당한 충의는 유불(儒佛)에 같이 빛이 되리니, 아! 후생들은 이 글을 거울삼아 모범으로 삼을 것이다.
대사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요, 품계는 가의대부(嘉義大夫)이다. 호는 사명(四溟)·종봉(鍾峰)·송운(松雲)이다. 경진년 여름 부산 첨사 임형준 쓰다.
[嗚呼 龍蛇之變 可勝言哉 卓爾松雲之名 久益彰也 倡義危難之際 竟推源於孝忠 覺道慈悲之敎 素得力於經史 三入虎穴 寶首願賕 遠涉鯨波 孤魂普濟 交隣兩國 豫定幾千年之約條 雨露一天 咸賴億萬生之繁息 追恩承罽 身已擬於寵深 抗章乞骸 志不易於富貴 謝宜藥於伽倻 大化將順 祥光燭天 刱祠宇於密州 盛典攸曁 風聲永樹 四鎭築役 旣完此城 十載勳勞 㝡著玆土 歲月滋久 往迹蒼茫 迬昔未遑 勒此不泯 堂堂忠義 儒釋同光 嗟嗟後昆 鑑玆爲則 慈通弘濟階嘉義 號泗溟鍾峰松雲 庚辰夏釜山僉使任衡準書]”
[의의와 평가]
유정 대사 충의비는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유정 대사의 흔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