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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687
한자 鄭墓碑
영어의미역 Stone monument for Jeongmyo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양정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전기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관련인물 정언섭(鄭彦燮)|정혁선(鄭赫先)
재질 석재
건립 시기/일시 1732년 11월연표보기 - 정묘비 건립
현 소재지 화지 공원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양정동지도보기

[정의]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양정동 화지 공원에 있는 조선 후기 동래 정씨 시조 묘역에 세운 비.

[개설]

정묘(鄭墓)는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양정동 화지산(華池山) 자락의 화지 공원에 있는 동래 정씨 2세인 안일 호장 정문도(鄭文道) 묘동래 정씨의 시조 묘역이다. 이곳에는 동래 정씨 문중의 재실인 추원사(追遠祠)화지사, 시조 묘 등이 있다. 정묘 비(鄭墓碑)는 예로부터 명산인 화지산에 시조인 정문도의 묘를 조성하여 자자손손 번창하였다는 내용을 싣고 있다.

[건립 경위]

정언섭(鄭彦燮)이 동래 부사로 있을 때 밀양 부사 정혁선(鄭赫先)과 인근 고을 수령을 지내는 종친이 출자하여 종계(宗契)를 조직한 뒤 서로 화목을 다지고 선대의 무덤을 수호하기를 계획한 끝에 1732년(영조 8) 11월 무덤의 남쪽에 돌을 깎아 비석을 세우고 묘갈을 기록하였다.

[위치]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양정동 화지 공원 내의 시조 묘역에 있다.

[형태]

비석의 재질은 돌이다. 사면이 같은 넓이이며, 앞면에 비문이 적혀 있다. 이수(螭首)는 첨부석으로 탑의 옥개석과 비슷한 모양이다. 약 60㎝ 높이의 대석(臺石)이 비석을 받치고 있으며, 비석의 네 모서리와 아랫부분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금석문]

비제(碑題)는 ‘정묘비’이고,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명 조선국 동래 정씨 시조 고려 안일호장 부군 묘갈(墓碣), 제22대손 통정대부 동래 부사 정언섭이 삼가 쓰다. 세상에서 씨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모두 동래 정씨가 세가(勢家)요, 대성이라 하고 풍수가들도 화지산의 정묘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명당자리라고 한다. 대개 고려에서 조선에 이르도록 천여 년간을 봉분이 뚜렷하며 제사가 끊어지지 아니하고 자손이 길이 번성하며 공경대부들이 국사와 가보에 찬란히 빛나고 있으니, 그것은 모두가 이 무덤이 덕을 심은 보답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 뿌리가 깊어야 가지가 무성하고, 냇물이 넉넉하면 멀리 흘러가나니, 이 어찌 근본이 없이 그렇게 될까 보냐.

무덤 앞에 본디 나지막한 비석이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낡았으므로 숙종 27년 신사년[1701]에 20대손인 감사 정시선(鄭是先)이 밀양 부사가 되었을 때 돌을 깎아 비석을 고쳐 세우면서 그 뒤쪽에 간략하게 사적(事蹟)을 기록하였는데 그 글을 살피니 ‘공의 이름은 정문도이며 정씨의 시조이고, 무덤은 동래 화지산 정남향 자좌 오향(子坐午向)이오. 상세(上世)를 고증할 문적(文籍)이 없더니, 효종[1656~1659] 때 경기도 장단 고을 송림산 아래의 옛 무덤이 허물어져 지석(誌石)이 나타났는데 예부 상서 문안공(文安公) 정항(鄭沆)의 무덤이더라. 거기에 그 선대는 동래 사람이고, 아버지 정목(鄭穆)은 섭태부경(攝太府卿)이며, 할아버지 정문도와 증조할아버지 정지원(鄭之遠)은 모두 본군(本郡)의 호장이라.

정항은 23세인 숙종 임오년[1102] 과거에 급제하여 인종 병진년(丙辰年)[1136] 곧 송나라 소흥 6년에 졸하였고, 정항은 형이 세 분인데 정제(鄭濟)는 일찍 돌아가시고 정점(鄭漸)과 정택(鄭澤)은 모두 문장과 재간으로 조정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라고 하였으니 공의 연대기는 이것으로 미루어 짐작이 되지만, 매우 조심성 있고 부드러우며 무던하고 거짓 없이 정성스러운 덕행과 겸손하고 공손하며 꾸밈없이 검소한 모습은 한 씨족의 시조가 되어 후세 자손들이 본받기에 충분한데도 전기가 거의 없어져서 전하지 아니한다.

『동래군지(東萊郡誌)』에 ‘공이 현리(縣吏)로 있다가 나이 많아 집에서 지낼 때 달마다 초하룻날에 나팔 부는 소리를 들으면 고을 원이 조회를 시작하는 줄 알고 문득 뜰에 내려가 엎드려 절을 하였다’라고 하니 그 공손함이 이와 같았다. 또한 ‘공이 돌아가시어 장사 지내려 할 때 상여가 화지산에 이르니 범이 쭈그리고 앉아 눈이 녹은 이상한 자리가 있으므로 거기에 장사 지냈다’라고 하였으며 이제껏 온 고을이 모두 정 호장(戶長)의 이름을 알고 있으며 그 무덤을 가리켜 정묘라고 부르며 초동목수도 들어가지 아니하니 무덤가의 나무가 무성하게 잘 자라고, 지역이 남쪽의 바닷가에 있고 여러 차례 난리를 겪었지만 이곳이 침노당하지 아니하였으니, 이 어찌 공의 덕을 베풀고 선행을 두터이 한 까닭이 아닐까 보냐.

족보를 펴 보면 공의 손자가 네 사람인데 시랑 정제와 어사잡단(御史雜端) 정점은 자손이 전하지 아니하고, 정항은 곧 묘지문의 문안공을 이르는데 또한 자손이 전하지 아니하며 오직 문하첨의찬성사(門下僉議贊成事) 급사중(給事中)인 정택이 고려조에 유명하여 인종 11년[1133] 계축 9월에 예빈소경(禮賓少卿)으로 사신이 되어 금나라에 다녀온 것이 『고려사(高麗史에)』 실려 있다. 공의 자손은 찬성공 정택에 이르러 더욱 창성하여 자못 전국에 두루 퍼져 살고, 대대로 명공거경(名公巨卿)이 나타나 왕실을 돕고 나라를 위하여 세록지신(世祿之臣)이 된 자가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다.

대저 거짓 없이 삼가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으니 그 끼친 메아리가 지금까지 그대로 남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정씨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가풍이라고 한다. 나 정언섭이 대를 이은 나라의 은혜와 조상 음덕을 입어 이 고을을 다스리는 동래 부사가 되어 성묘를 하니 한 기운으로 번져 나오는 느낌을 가누지 못하겠기로 문중의 어른인 밀양 부사 정혁선과 함께 가까운 고을에서 수령을 지내는 종친에게 알렸다.

그리고 각 봉급에서 거출하게 하여 위토(位土)를 더 장만하고, 고을 일족이 무덤 앞에 모여서 종계를 조직하여 종족 간에 화목하고 선대의 무덤을 수호하기로 다짐하였으나 그래도 오랜 세월이 지나면 언덕과 골짜기도 달라지고 묘표의 기록도 알아보기 어려울까 두려워 무덤의 제절(祭砌) 남쪽 여남은 걸음쯤에 다시 돌을 깎아 세우고 묘갈을 기록한다. 내용은 묘표의 뒤쪽 기록[陰記] 전문과 또 『동래군지』에 실린 글 중에서 후세에 증거가 될 만하고, 묘표의 뒤쪽 글에 빠진 것을 간략하게 더 보태어 기록한다.

또 무덤 앞의 석물이 너무 간소하여 고쳐 세워야 마땅하나 감히 하나하나 새롭게 더하지 아니하는 것은 겉치레만 아름답게 꾸미다가 끼치신 충(忠), 후(厚), 질(質), 검(儉) 한 덕을 다치게 할까 봐 저어함이다. 아! 금용산이 깎이고 닳아 숫돌이 되고 봉래 바다가 마르고 줄어 개울이 되도록 뒷사람들이 여기 와서 이 글 읽기를 공손히 두 손 맞잡고 바라노라. 감역 후손 유학 정진교. 숭정 갑신 후 89년 임자[1732] 11월에 세우다. 절충 김창하[鄭墓碑 有明朝鮮國東萊鄭氏始祖高麗安逸戶長府君墓碣 二十二代孫通政大夫東萊都護府使彦燮敬書 世之譚氏族者 皆以東萊之鄭 爲世家大姓 堪輿家 又以華池鄭墓 爲東國名墓云 盖自勝國 逮于我朝 千有餘年之間 封域宛然 香火不絶 子孫愈久綿昌 累公累卿 國史家譜 爛燁相望 其始皆出於此墓種德之報也 噫 根深則枝茂 川豊則流遠 此豈無所本而然哉 墓前 舊有短碑 歲久殘缺 我肅宗大王二十七年辛巳 二十代孫監司是先 爲密陽府使時 伐石改竪 略記其陰 謹按其記 曰公諱文道 爲鄭氏始祖 葬在東萊華池山子坐原 而其上世 無文可徵 至我孝宗大王時 長湍松林山下 有古墓 毁而幽誌出 乃禮部尙書文安公鄭沆墓也 有曰 其先東萊人 考諱穆 攝太府卿 祖諱文道 曾祖諱之遠 皆爲本郡戶長 沆年卄三 高麗肅宗壬午登科 卒于仁宗丙辰 卽宋之紹興六年 沆三兄 濟早卒 漸·澤 皆以文章材幹有名于朝云 嗚呼 公之年代 此可槩見 而獨其謹厚忠懿之德·謙恭贊儉之風 宜其爲人家肇始之祖 爲後世子孫之法者 闕而無傳 郡志曰 公以縣吏 老而家居 每月朔 聞吹角聲 則以爲官長開衙 輒下庭拜伏 其恭如此 郡志又曰 公歿而葬也 行喪 至于此山 適有雪消虎踞之異 故就而葬之云 至今鄕里家闀 皆知鄭戶長之名 而指其墓曰鄭墓 樵牧不入 立木無恙 地在南邊 燹刦屢經 而亦不敢犯逼 豈非公之積德厚善有以致是也歟 按譜 公之孫四人 侍郞濟 御史雜端 漸子孫無傳 沆卽幽誌所謂文安公也 □□□無 傳 惟門下僉議贊成事給事中諱澤 有名麗朝 在仁宗時 以禮賓少卿 奉使如金 事載麗史 公之子孫 至贊成公 尤益昌大 至于今 殆遍一國 代出名公碩卿 輔佐王室 爲國世臣者 不可盡錄 大率以忠厚恭謹爲法 其流風餘韻 尙今不衰 世稱鄭氏世 傳之家範云 彦燮 世受國恩 獲蒙先蔭 來守玆土 瞻掃塋域 不勝一氣流通之感 遂與宗長密陽府使赫先 通告於姓族之爲旁近邑宰者 各割官俸 增置祭田 又與此鄕同宗 修契於墓下 以爲收宗族護丘墓之圖 尙懼夫過此千百世之後 陵谷易變表記難認 卽墓階之南十許步 治石而碣之 記文則盡用表陰全文 又以郡志所載 徵信於後世 見漏於表陰者 略爲添錄 至若墓前石儀 太近簡樸 宜在修改者 亦不敢一一增新以取觀美者 恐傷忠厚質儉之遺德也 凡爲此墓之子孫者 其敢有荒墜先德違棄家風者乎 噫 湧山如砥 蓬海如瀆 拱手以竢後人之來讀云爾 監役後孫幼學震僑 崇禎甲申後八十九年壬子 十一月日 立 折衝 金昌夏].”

[현황]

화지산의 화지 공원 내 동래 정씨 사당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관리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

[의의와 평가]

정묘비는 부산 지역의 토착 세력인 동래 정씨 가문의 시조 묘인 정묘에 세워진 묘비로, 비문의 내용을 통해 선조의 활동 및 문중의 동향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7.08.16 정의 서술 수정 2대조인 -> 2세인
이용자 의견
정** 개설 첫번째줄의
{2대조인 }을 [2세인]으로 수정하여 주십시오. 2대조라 하면 관계를 나타내는 용어로 바른 표현이 아닙니다.
  • 답변
  • 부산역사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하의 의견을 반영하여 해당 서술을 수정하였습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이용과 관심 부탁드립니다.
2017.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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