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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305
한자 梁誌
영어음역 Yang Ji
이칭/별칭 언신(彦信),충민(忠民)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송동 153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진상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남원
대표관직 삭녕 군수
출생 시기/일시 1553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83년 - 무과 별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삭녕 군수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592년 10월 18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91년 - 표절사에 배향
추모 시기/일시 1796년 - 시호를 받음, 이조 판서에 추증
부임|활동지 삭녕군 관아 - 경기도 연천군
묘소|단소 양지 묘 - 경기도 장단군 진동면
사당|배향지 반송삼절사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송동 143지도보기
사당|배향지 표절사 - 충청남도 청양군 운곡면 모곡리 36

[정의]

임진왜란 때 순절하여 부산 반송 삼절사(盤松三節祠)에 배향된 문신.

[가계]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언신(彦信). 눌재(訥齋) 양성지(梁誠之)의 5세손으로, 고조 할아버지는 승지 양찬(梁瓚)이고, 증조 할아버지는 사헌부 지평 양숙(梁淑)이며, 할아버지는 봉사 양윤지(梁允智)이다.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양사재(梁思齋)이다. 어머니는 죽산 박씨(竹山朴氏)이다.

[활동 사항]

양지(梁誌)[1553~1592]는 음직으로 적성 현감을 지냈고 1592년(선조 25) 삭녕 군수에 임명되었다. 양지가 부임했을 때 왜군이 철원에 진을 치고 있어 곧 쳐들어올 것을 알고 가족에게 이르기를, “신하된 도리로 국난을 당하여 구차스럽게 살 수는 없다. 하물며 우리 집안은 대대로 국록을 받았으니 죽음으로 보국하는 것이 나의 뜻이다”라고 하였다. 왜군이 밤을 틈타 쳐들어오자 양지는 양팔을 휘두르며 혼자서 대적하다가 기운이 빠져 붙잡혔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꼿꼿한 자세로 왜군을 꾸짖다가 살해되었다.

[묘소]

양지의 묘는 경기도 장단군 진동면에 있다.

[상훈과 추모]

1791년(정조 15) 삭녕[현 경기도 연천군에 있던 고을]에 표절사가 건립되었다. 1796년(정조 20) 충민(忠愍) 시호와 함께,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온양 구령리 양지의 후손 집 앞에 정려가 세워졌다. 1839년(헌종 5) 동래 사림(士林)의 제의로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송동반송 삼절사가 건립되어 양지를 배향하였다. 1891년(고종 28) 충청도 온양에 표절사가 세워졌으나 이후 서원 철폐령으로 허물어졌다. 1959년 후손들이 충청남도 청양군 운곡면 모곡리에 다시 표절사를 지어 양지를 배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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