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7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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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鏞洽 |
영어음역 | Bak Yongheup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은승 |
[정의]
부산에서 활동한 성악가이자 음악 교육자.
[활동 사항]
박용흡(朴鏞洽)[1919~1976]은 1919년 경상남도 사천에서 출생하여, 일본 중앙음악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하여 졸업하였다. 성악가가 된 후로 밝은 음색의 바리톤으로 부산의 연주 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독창 무대뿐만 아니라 합창 등 다양한 연주 활동에 참여하였다. 6·25 전쟁 후 부산에 정착하여 부산여자고등학교와 경남여자고등학교 등에서 음악 교사로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박용흡은 다양한 음악회에 출연하였는데, 1947년에는 7월 29부터 30일까지 경남음악협회 주최로 열린 수해 구제 음악회에 찬조 출연하였다. 이 음악회는 회장인 금수현(金守賢)이 주도하고 지휘도 맡았는데, 이 연주회에 출연한 박용흡과 李안드레아의 프로필이 프로그램에 소개되어 있다.
1953년에는 육군교향악단의 연주회 무대에 섰으며, 육군 중령 김판기의 지휘 아래 육군군악학교 합창단을 비롯하여 성악가 박용흡, 한평숙이 출연하였다. 연주 곡목은 바리톤 독창 「새벽별」, 교향시 「핀란디아」 등이었다. 또 같은 해인 1953년 12월 22일부터 23일까지는 남성여자중학교 강당에서 남성여자고등학교의 주최로 열린 이재민 구제 음악회에 참여하였는데, 이날의 연주는 음악·무용·연극이 포함된 총체 예술 무대로 마련되었다. 여기에는 김창섭·김점덕(金點德)·박용흡·배도순(裵道淳)·김학성(金鶴成) 등과 합창단이 다수 출연하였으며, 음악회는 당시 국제 시장 화재 참사를 당한 시민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박용흡은 고태국(高泰國)의 주도 아래 1957년 조직된 부산 최초의 남성 합창단인 ‘콜 에오리안(Chor Aeolian)’의 멤버로 활동하였다. 콜 에오리안은 부산에서 활동한 음악인들이 음악 문화에 이바지해 보자는 시도로 만들어진 합창단으로 음악 교수, 음악 교사 12명으로 조직되어 매년 2회의 정기 공연을 하여 음악계에 많은 관심을 갖게 하였다. 1957년 12월 27일에 발족되어 중구 광복동 신신 예식장에서 제1회 연주회를 가졌는데 그때의 멤버는 고태국·김진안(金璡安)·김창배(金昌培)·김철휘(金哲輝)·김준선(金俊善)·하오주(河五柱)·유신(劉信)·방부원·박영(朴暎)·박용흡·김종일(金宗一)·제갈삼(諸葛森) 등이었으며, 피아노는 제갈삼이 맡았다. 콜 에오리안의 제2회 연주회는 1959년 2월 21일에 대청장 홀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후로도 몇 회의 연주회가 계속되었다. 콜 에오리안은 순수한 고전 음악에서부터 경음악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레퍼토리를 선보였으며, 편곡은 주로 이상근(李相根)과 유신이 담당하였다.
1961년에는 부산오페라단이 연주회 형식으로 마스카니의 가극인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전곡 모두 공연하였는데, 이때에 김창배가 지휘를 맡고, 제갈삼이 피아노 반주를 하였으며, 박용흡은 무대에 출연하여 밝은 음색의 바리톤으로 호평을 받았다. 당시 이 공연은 제대로 된 의상도 없이 피아노 반주만으로 이루어진 연주회 형식의 공연이었지만 순수 부산 음악인들에 의해 기획·연주됨으로써 황무지를 면치 못하고 있던 부산 오페라계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또한 1965년 10월 6일에는 중구 광복동 신신 예식장에서 부산 최초로 부산연주가협회의 창립총회를 가졌는데, 박용흡은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때 함께 참여한 사람으로는 오태균(吳泰均)·고태국·김부열·박용흡·김진문·배종구·장혜경·유영자 등이 있다. 같은 해 12월 17일 부산연주가협회가 주최한 제1회 신인 음악회 프로그램에 따르면 박용흡은 운영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박용흡은 1976년 11월 27일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