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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705
한자 鄭智謨
영어음역 Jeong Jimo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매곡길 17[매학리 125]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선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출생 시기/일시 1893년 3월 13일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9일 - 좌천 장터 3·1 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30일 - 징역 10월형을 선고 받음
몰년 시기/일시 1925년 10월 22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6년연표보기 -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4월 9일연표보기 - 좌천 장터 3·1 운동
출생지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평리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매학리 125
활동지 좌천 장터 -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좌천리 53지도보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가계]

아버지는 정인길이고, 어머니는 이출구이다.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매학리 김재교의 장녀인 김매월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낳았다.

[활동 사항]

정지모(鄭智謨)[1893~1925]는 1893년 3월 13일에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평리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9년 전국에서 발생하는 3·1 운동 소식과 기장면 3·1 운동 소식을 접하면서 정관면에서도 만세 시위를 계획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정지모는 같은 면에 사는 오해환·신두성(辛斗星)·오진환·김종복·김윤희(金允熙)·박일봉(朴一鳳) 등과 함께 김종복의 사랑방에 모여 비밀리에 시위를 계획하고 거사일을 좌천 장날인 4월 9일로 정하였다.

4월 9일 정지모 등 시위 주동자들은 장시 중앙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이 불렀다. 이에 호응한 500~600명의 장꾼들도 일제히 만세를 부르며 경찰의 제지를 물리치고 장시를 누비며 울산으로 통하는 거리까지 만세 시위를 하였다. 시위가 고조되고 시위 군중이 늘어나자 일본 군경은 야만적인 무력 탄압과 발포로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때 정지모는 오진환 등과 함께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시위 군중들은 붙잡힌 주동자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좌천주재소로 가서 일본 군경과 투석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체포된 주동자들이 석방되었으며, 시위 군중들은 좌천에서 정관으로 돌아오는 내내 만세를 불렀다.

그 후 정지모는 결국 일본 경찰에게 주동자로 체포되어 1919년 4월 3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문 후유증으로 1925년 10월 22일에 사망하였다.

[묘소]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금곡리 선영에 있었으나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96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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