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5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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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梁達錫 |
영어음역 | Yang Dalseok |
이칭/별칭 | 여산(黎山)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이영준 |
[정의]
부산에서 활동한 미술가.
[활동 사항]
양달석(梁達錫)[1908~1984]은 1908년 10월 18일 경상남도 거제시 사등면 사등리 성내 마을에서 아버지 양우유와 어머니 신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여산(黎山)이다. 어릴 때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 유년기에 머슴살이를 할 정도로 가난하였다. 16살이 되던 1924년 자형의 도움으로 통영사립강습소에 입학하여 비로소 현대식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이후 진주공립농업학교에 진학하여 어렵사리 학업을 이어갔는데, 이때 그림에 흥미를 느껴 그림 공부에 열중하였다. 1932년 조선 미술 전람회에 수채화가 입선된 후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제국미술학교 서양학과에 입학하여 고학으로 그림 활동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몸이 쇠약하여 고향에 돌아와 1935년부터 3년간 사등면 서기로 재직하였다.
이후 부산으로 이주하여 초상화도 그리고 공장에서 잡부 노릇도 하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동경공업기술학교 제도과에 입학한 양달석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이 무렵 양달석은 조선 미술 전람회에 1932년에 이어 1938년과 1939년 연달아 입선하였으며, 일본의 독립전에 출품하여 여러 차례 입상하였다. 1937년 양달석은 부산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동인 그룹인 춘광회의 동인으로 서성찬(徐成贊)·김남배(金南倍)·우신출(禹新出) 등과 함께 활동하면서, 1940년 부산 미술 전람회 서양화부에서 최고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1945년 양달석은 조선미술동맹에 참여했는데, 이는 뒤에 양달석을 좌익으로 몰아붙이는 빌미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정작 양달석은 이내 정반대로 돌아서서 한국미술협회에 참여하여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부산지부장을 맡았으며, 6·25전쟁 때는 종군 화가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1946년부터 1947년까지 양달석은 잠시 경남상업고등학교의 미술 교사로 재직하기도 하였다. 이후 양달석은 개천 예술제의 심사 위원, 1974년에는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의 추천 작가 및 초대 작가를 역임하였다.
동심이 깃든 향토적인 그림을 많이 남긴 서양화가 양달석은 ‘소와 목동’의 화가로 많은 미술 전람회에 참여하고 36회에 걸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화가 생활 50년 동안 2,600여 점의 그림을 그렸으며, 1984년 76세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대표 작품으로 「농가(農家)」[1953, 삼성 미술관 리움 소장]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40년에 부산 미술 전람회 서양화부 최고상을 수상하였고, 1963년에 경상남도 제1회 문화상을 수상하였으며, 1976년에 부산시 향토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경상남도 거제시 사등면 사곡리 삼거리 소공원에 화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