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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407
한자 池錫永
영어음역 Ji Seokyeong
이칭/별칭 공윤(公胤),송촌(松村)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우장춘로 155[온천1동 산27-9]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강정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의사|국어학자
성별
본관 충주
대표관직 동래 부사|조선병원 원장
출생 시기/일시 1855년 5월 15일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79년 - 부산 제생의원에서 종두법을 배움
활동 시기/일시 1883년 - 문과 급제, 성균관전적, 사헌부 지평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885년 - 『우두 신설』 저술
활동 시기/일시 1887년 - 전남 강진에 유배
활동 시기/일시 1893년 - 우두 보영당 설립
활동 시기/일시 1894년 - 형조 참의, 승지, 대구 판관, 한성부 윤 역임
활동 시기/일시 1895년연표보기 - 동래 부사, 동래부 관찰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896년연표보기 - 부산항 재판소 판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898년 - 황해도 풍천에 유배
활동 시기/일시 1899년 - 의학교 초대 교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09년 - 『언문』, 『훈몽자략』, 『자전석요』 발간
활동 시기/일시 1914년 - 의생 면허 취득
활동 시기/일시 1915년 - 전선의생회 회장에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17년 - 조선병원장에 취임
몰년 시기/일시 1935년 2월 1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96년 - 선정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1988년 - 공덕비 건립
출생지 한성부 - 서울 종로구 낙원동 17
외가|처가 덕산 - 충청북도 충주시 덕산면
부임|활동지 한성부 - 서울특별시
부임|활동지 동래부 -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421-56지도보기
부임|활동지 관립 경성의학교 - 서울특별시
유배|이배지 강진 신지도 - 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면 신상리
유배|이배지 풍천 - 황해도 풍천
묘소|단소 지석영 묘 -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57-1 망우 묘지 공원
선정비 기장읍성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서부리지도보기
공덕비 금강 공원 -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1동 산27-9지도보기
지석영 동상 서울대학교 의학박물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정의]

개항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겸 의료인.

[가계]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공윤(公胤), 호는 송촌(松村). 아버지는 지익룡(池翼龍)이다.

[활동 사항]

지석영(池錫永)[1855~1935]은 한성부 중서훈동 12통 9호[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서학을 동경하여 중국에서 번역된 서양 의학책을 많이 읽었다. 특히 영국 제너(Edward Jenner)의 종두법(種痘法)[천연두 예방을 위해 백신을 피부에 접종하는 것]에 흥미를 느껴 1876년(고종 13) 수신사 김기수(金綺秀)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가게 된 스승 박영선(朴永善)에게 일본의 종두 현황을 조사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박영선이 『종두귀감(種痘龜鑑)』을 가져다주어 이 책을 보고 구체적으로 종두법을 공부하였다.

1879년(고종 16) 일본 해군이 부산에 세운 제생의원(濟生醫院)을 찾아가 두 달 정도 머무르면서 원장 마쓰마에[松前讓]와 군의 도즈카[戶塚積齋]로부터 종두법을 배우고, 시술법도 익혔다. 같은 해 12월 두묘(痘苗)[천연두 백신의 원료] 3개와 종두침 2개를 구해 귀경하던 중, 처가가 있는 충청북도 충주시 덕산면에 들러 두 살 된 처남과 마을 어린이 40명에게 우두를 접종하였다. 이것이 국내에서 최초로 이루어진 종두 시술이다.

지석영은 서울에서 종두를 실시하여 호평을 받았으나 두묘 공급이 잘 안 되어 1880년(고종 17) 2차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 우두종계소(牛痘種繼所)를 방문하여 종묘 제조법(種苗製造法)·채두 가수장법(採痘痂收藏法)·독우 사양법(犢牛飼養法)·채장법(採藏法) 등 우두 관련 기술을 배우고 돌아왔다. 이후 서울에 종두장(種痘場)을 건립하였으나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으로 불타 버렸다. 정국이 안정되자 같은 해 9월 전라도 어사 박영교(朴永敎)의 요청으로 전주에 우두국을 세우고, 1883년(고종 20) 충청도 어사 이용호(李容鎬)의 요청으로 공주에도 우두국을 개설하였다. 같은 해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지석영은 1885년(고종 22) 『우두신설(牛痘新說)』을 저술하여 종두 보급의 체계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1887년(고종 24) 시폐(時弊)[잘못된 폐단]를 논하였다가 강진 신지도로 유배를 갔는데, 유배지에서도 종두 보급과 교육을 계속하였다. 1892년(고종 29) 풀려나 이듬해 서울 교동에 우두보영당을 설립하였다. 지석영은 1894년(고종 31) 관직에 복귀하여 형조 참의, 승지 등을 역임하고, 1895년(고종 32) 동래 부사, 동래부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그해 5월 갑오개혁에 참여하였고, 「종두 규칙」을 만들어 생후 70일~돌 무렵의 아기들에 대한 우두 접종을 의무화하는 한편 예방 접종의 필요성을 꾸준히 홍보하였다.

1896년 부산 재판소 초대 판사로 재임하면서 지역민들에게 우두를 놓기도 하였다. 지석영은 1899년(고종 36) 문을 연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의학 교육 기관인 경성의학교 설립을 주도하여 1907년(순종 1) 대한의원에 통합될 때까지 교장을 지냈다. 지석영은 국어학자이기도 하였다. 대한제국이 1905년(고종 42) 7월 공포한 「신정국문(新訂國文)」을 상소하여 한글의 올바른 사용과 교육을 주장하였으며, 주시경(周時經)과 더불어 한글 가로쓰기의 선구자가 되었다. 1907년(순종 1) 국문연구소를 세워 총무로 활동하였고, 우리나라 최초의 한자 사전인 『자전석요(字典釋要)』를 간행하였다.

[학문과 저술]

1885년(고종 22) 의학 서적인『우두 신설』을 썼다. 국문 관련 저서로는 『자전석요』[1907년], 『언문(言文)』[1909년], 『훈몽자략(訓蒙子略)』[1909년] 등이 있다.

[묘소]

지석영의 묘는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57-1번지 망우 묘지 공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1896년(고종 33)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기장읍성에 동래 관찰사 지석영의 선정을 칭송하는 선정비가 세워졌다. 1988년 부산광역시와 충주 지씨(忠州池氏) 문중은 부산과 지석영의 깊은 인연을 기념하여 동래구 온천1동 금강 공원에 높이 422㎝, 너비 85㎝의 공덕비를 세웠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 의학박물관에는 지석영 동상이 있다. 의료계에서는 종두 보급에 힘쓴 지석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송촌 지석영 의학상’을 제정하여 의학 분야에서 활발한 학술 활동과 탁월한 업적을 이룬 의료인에게 상을 수여하고 있다. 지석영은 의료인과 국어학자로 탁월한 업적을 남겼음에도 친일 행적이 자주 거론된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추도사를 낭독하였다는 이유로 ‘과학 기술인 명예의 전당’ 헌정과 ‘20세기 부산을 빛낸 인물’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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