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2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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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洪秀 |
영어음역 | Gim Hongsu |
이칭/별칭 | 치열(致烈)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 225-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유영옥 |
[정의]
개항기 부산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치열(致烈).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1464~1498]의 11세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김복만(金福滿)이고, 할아버지는 김유관(金宥寬)이며, 아버지는 김흥식(金興植)이다. 어머니는 성주 이씨(星州李氏)이다. 부인은 남원 양씨(南原梁氏)로 양익하(梁益夏)의 딸이다. 아들은 김성무(金性舞)이고, 딸은 남평(南平) 문선희(文善禧)에게 출가하였다.
[활동사항]
김홍수(金洪秀)[1843~1903]는 지금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에서 태어났다. 천성적으로 효심이 깊어 부모를 정성껏 봉양하여 아버지가 왕래하는 길이 가파르면 높은 곳은 깎고 낮은 곳은 매웠으며, 산과 강을 건너야 할 때는 나무판으로 다리를 놓아 사람들은 그곳을 ‘효자로(孝子路)’와 ‘효자교(孝子橋)’로 불렀다고 한다. 아버지가 병들자 하늘에 기도하고, 대변을 맛보면서 병구완을 했으며, 손가락을 끊어 죽어 가는 아버지를 살렸다. 부모가 천수를 누리고 죽은 뒤에는 3년간 시묘(侍墓)를 살면서 피눈물을 흘리며 애통해하였다. 1900년(고종 37) 효릉 참봉(孝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3년 뒤 환갑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향촌의 사림과 관찰사가 김홍수의 효행을 추천하여 조정에서 여러 차례 정려 수여가 논의되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풍속이 변해 아름다운 행실이 잊혀졌다. 이에 계미년[1943년으로 추정] 8월 소성(邵城) 이민희(李民熙)가 비문을 지어 갑신년[1944년으로 추정] 3월에 사위 문선희가 ‘참봉 김해 김홍수 효사비(參奉金海金洪秀孝思碑)’를 세워 김홍수의 효행을 널리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