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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103
한자 開雲浦萬戶營
영어의미역 Gaeun-po Manhoyeong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관부(전통 시대)
지역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심민정

[정의]

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 있던 수군 만호영.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 전기 왜구 문제 등에 대한 대응 방책 가운데 하나로 수군 진영이 설치되었고, 세종조에 수군 진영의 제장들에게 만호(萬戶) 명칭을 부여하고 수군 만호영을 관할하게 하였다. 이런 과정 중에 울산의 개운포에도 수군 만호영이 설치되었고, 임진왜란 이후 부산 해안 주변의 중요성을 인식한 결과 1629년(인조 7) 수군절도사영을 비롯한 수군 만호영 등이 부산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개운포 만호영(開雲浦萬戶營)도 그 과정에서 부산 지역으로 옮겨 설치된 수군 진영이다.

[조직 및 담당 직무]

수군 만호영의 군선 임무와 군솔에 대해 『동래부지(東萊府誌)』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감관(監官), 지곡관(知穀官), 교관(敎官), 토사부(土射夫), 포수(砲手), 격군 중 뛰어난 자[能格軍], 분방 사부(分防射夫), 방군(防軍) 80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변천]

개운포에 만호영이 처음 설치된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1457년(세조 3) 만호영이 일시적으로 혁파되었다가, 1458년(세조 4) 다시 만호영이 설치되는 과정을 거쳤다. 그러다가 1459년(세조 5) 동래 부산포에 있던 경상 좌도 수군 도안무처치사영(水軍都安撫處置使營)이 개운포로 이설되면서 개운포는 수영과 만호영이 병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종 대에 편찬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진관 개편 내용에서는 개운포를 찾을 수 없으므로 혁파된 듯이 보이나, 중종조에는 다시 등장하고 있다.

1511년(중종 6) 부산포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수영을 개운포에서 부산포로 옮기자는 건의가 나오기는 하였으나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이후 각종 왜변과 임진왜란을 겪었다. 임진왜란 후 제일 먼저 전투가 벌어진 부산의 중요성이 이때 재인식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을 비롯한 각종 수군 진영이 부산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이전하여 재편성되었다.

1629년(인조 7) 개운포 만호영도 그 과정에서 부산 지역으로 옮겨 오게 되었다. 『동래부지』에 의하면 “개운포는 부의 남쪽 21리에 있고 수군만호가 있다”라고 되어 있으며, 「1872 군현 지도 두모진 지도(1872郡縣地圖豆毛鎭地圖)」에 부산진의 남쪽 정공단(鄭公壇) 바로 아래에 개운진이 표시되어 있으므로 오늘날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일대인 조선 시대의 사도촌(沙道村) 일원으로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 이후 부산 지역이 해양 방어상 중요 지역이 된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개운진을 비롯한 수군 진영의 기능 등을 되짚어 보는 데 개운포 만호영이 중요한 구실을 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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