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장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562
한자 扶安張氏
영어공식명칭 Buan Jangssi|Buan Jang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원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본관 부안 - 전라북도 부안군
입향지 부안 장씨 입향지 -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장동리지도보기
세거|집성지 부안 장씨 세거지 - 전라북도 부안군
성씨 시조 장정필(張貞弼)[도시조]|장을호(張乙湖)[시조]

[정의]

장정필을 도시조로 하고, 장을호를 시조로 하는 전라북도 부안군의 세거 성씨.

[개설]

부안 장씨(扶安張氏) 시조 장을호(張乙湖)는 고려 시대 관료로 원래 안동 장씨(安東張氏) 시조 장정필(張貞弼)의 6세손이자 장금용(張金用)의 현손인데 고려 인종(仁宗) 때 좌복야(左僕射)로 부령군(扶寧君)에 봉하여졌다. 이에 후손들이 부안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연원]

덕수 장씨(德水張氏)를 제외한 장씨의 도시조는 장정필(張貞弼)이다. 고려의 개국공신인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태사(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太師)라는 작위를 받았다. 부안 장씨의 시조는 장정필의 6세손인 장을호(張乙湖)이다. 장을호의 호는 행은(杏隱)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으로 고려 인종 때 벼슬이 복야(僕射)에 이르고 부령군에 봉군되었다. 이 때문에 처음으로 부안에 들어와 살았으며 이후 그의 자손이 부안에서 번성하며 토착 성씨로 세거하였다. 부안 장씨는 고려 시대 부안의 토반(土班)인 호(扈)·임(林)·장(張)·장(蔣) 중 하나이다.

장을호의 아들 장효(張斅)는 찬성사(贊成事)에 전리판서(典吏判書)를 지냈으며, 손자 장대환(張大紈)은 상호군(上護軍)이었다. 장대환의 아들 장재(張載)는 중랑장(中郎將), 장대환의 증손자 장연(張璉)은 이부시랑(吏部侍郞)을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이었으며 한림학사로 원(元)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조선조에 이르러 장익(張翼)이 1483년(성종 14) 생원시에 합격하고, 1501년(연산군 7) 문과에 급제하여 고산 현감(高山縣監)을 지냈으나 연산군(燕山君)의 혼란한 정치에 실망하여 벼슬을 버리고 부안으로 돌아와 혼정(昏政)을 두 차례 직간하기도 하였다.

장익은 장백란(張伯鸞)과 장숙란(張叔鸞) 두 아들을 두었다. 형제가 1510년(중종 5) 나란히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장익의 후손인 장맹현(張孟賢)이 중종 조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장백란의 손자 장세형(張世衡)은 상서면 장다리[부안군 상서면 장동리]에 강당을 짓고 후진을 길렀는데 지금도 그 터가 남아 있다. 장세형(張世衡)의 증손 장운성(張運星)은 호가 황강(凰岡)인데 학업에 정진하여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조정에서는 동몽교관(童蒙敎官)의 벼슬을 내리었다.

[입향 경위]

장을호가 부령군에 봉군되며 처음 부안군 상서면 장다리[현 부안군 상서면 장동리]에 들어와 살았으며, 이후 그의 자손이 부안에서 번성하며 토착 성씨로 자리 잡았다. 이후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지만 근래에 와서 인동 장씨(仁同張氏)와 합친 사람이 많아 지금 부안을 본관으로 쓰는 사람은 줄었다고 한다.

[현황]

2015년 인구 주택 총조사에 따르면 부안군에는 부안 장씨 1,167명이 살고 있다. 부안 장씨가 처음 상서면 장다리에 터를 잡고 살았기 때문에 지금도 상서면 장동리에 가장 많이 살고 그 밖에 상서면고잔리, 장서리, 분장리와 보안면의 장춘동, 냉정리, 줄포면 줄포리행안면 신기리, 백산면 거룡리, 주산면 동정리, 진서면 왕포리, 변산면격포리마포리 등지에서 산재하여 거주한다.

[관련 유적]

장을호의 묘는 부안군 상서면 장동리 537-2번지에 있으며, 장익과 장백란, 장숙란 묘가 부안군 하서면 백련리 산65번지에 있다. 장익의 재실인 모원재는 부안군 하서면 백련리 242번지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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