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8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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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楊州崔氏 |
영어의미역 | Yangju Choe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정진각 |
세거지 | 안산시 상록구 사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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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시기/연도 | 1500년 경 |
성씨시조 | 최억 |
입향시조 | 최혼 |
최억을 시조로 하고 최혼을 입향조로 하는 경기도 안산의 세거 성씨.
안산의 양주최씨(楊州崔氏)는 입향조 독선당(獨善堂) 최혼(崔渾)이 무오사화의 혼란을 피해 안산 지역에 은신한 이래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형성된 성씨이다.
시조 최억(崔億)은 고려 공민왕 때 학행(學行)으로 양주군(楊州君)에 봉해지고 문경(文敬)이란 시호를 받았다.
최혼이 연산군 때 무오사화로 정국이 혼란하자 몸을 숨기기 위해 안산 지역의 구포(鷗浦)[현 상록구 사동]에 은거하기 시작하였다. 최혼의 아들들은 벼슬과 명망이 높았는데, 둘째 아들 최홍도(崔弘渡)는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의와 홍문관부제학에 올랐으며, 넷째 아들 최홍개(崔弘漑)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참전하였다가 순절하였으며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최홍개의 차남 최간(崔涆)은 최홍부(崔弘溥)의 장파(長派)로 입양되어 독선당 종가를 이었다. 최간의 아들 최정해(崔挺海)는 무과에 급제하여 고부군수와 병마절제사를 지냈으며 최정해의 손자 최여항(崔汝恒)은 안산에서 태어나 성장한 후 할아버지가 선정을 베푼 고부로 이주해 살면서 학문에 힘썼다. 최홍도의 아들 고산(孤山) 최준(崔浚)은 임진왜란 때 호성공신(扈聖功臣) 1등에 책록되어 장례원판결사를 지냈으며, 최홍주(崔弘澍)의 아들 최정(崔淨)은 음직으로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다.
최정의 둘째 아들 최정걸(崔挺傑)은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으며 나이 50세에 병자호란을 만나 임금 이하 조정이 남한산성에 포위된 채 전전긍긍하여 항복하고자 할 때 단기로 적진에 뛰어들어 적의 머리 7급을 베고, 이튿날 또 참전하여 순국하였다. 사후에 임금이 손수 예장을 마련하고 병조참판으로 증직하였으며 정려(旌閭)를 내려 국공을 기렸다. 이때 안산 지역에 사패지를 내렸다하나 기록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 최정걸의 후손들이 안산시 상록구 사동 일대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세거해 왔다.
반월공업단지가 조성되고 한양대학교 ERICA캠퍼스가 들어서고 이어 시화방조제가 건설되면서 세거지는 사라지고 아파트와 새로운 주택지로 변모되었다.
안산시 상록구 사동 감자골에 양주최씨 묘역(안산시 향토유적 제10호)과 최정걸 장군 묘(안산시 향토유적 제8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