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6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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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瑗 |
영어음역 | O Won |
이칭/별칭 | 백옥(伯玉),월곡(月谷),문목공(文穆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창현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백옥(伯玉), 호는 월곡(月谷). 증조부는 오숙(吳䎘), 할아버지는 오두인(吳斗寅), 생부는 공조정랑 오진주(吳晋周), 생모는 김창협(金昌協)의 딸이다. 숙부(叔父)인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와 현종의 딸인 명안공주(明安公主)에게 입양되었다.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에게 입양되었다. 이재(李縡)의 처질이다.
오원은 이재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23년(경종 3) 생원시에 합격하고, 1728년(영조 4)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문명(文名)이 높았다.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로 있을 때 영조에게 학문과 덕을 닦는 요령을 진언하여 가납되는 등 직언을 잘 하기로 이름이 났다. 1729년 사간원정언으로 있으면서 탕평책을 적극 반대하다가 한때 삭직되었다.
1732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듬해 교리를 거쳐 1734년 이조좌랑이 되었고 이듬해 예문관응교를 역임하였다. 1736년 참찬관으로 민형수(閔亨洙)를 신구(伸救)하려다가 파직되었으나 곧 다시 기용되어 1739년 부제학이 되고, 승정원승지, 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오원은 시정(時政)에 대해 건의를 많이 올렸다. 예컨대 영조에게 당나라 육지(陸贄)가 주의(奏議)한 양세법(兩稅法)의 여섯 가지 폐단을 진강하여 왕으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다. 또 성학(聖學)의 요무(要務) 조목을 밝히고 성덕(聖德)의 문제와 시정의 장부(臧否) 등을 입론하였다. 오원은 성품이 온후하였고, 문장 또한 청절(淸絶)하다 하여 진정한 유신(儒臣)이라는 평을 들었다.
문집으로 『월곡집(月谷集)』이 있다.
묘소는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에 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며,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남유용(南有容)이 묘갈의 비문을 찬하고, 오원의 아들인 오재소(吳載紹)가 글씨를 쓰고 전액(篆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