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4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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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應寅墓域 |
영어공식명칭 | Haneunginmyoyeok(Tomb of Han Eungin) |
영어의미역 | The Grave of Han Eungin |
이칭/별칭 | 한응인 선생 묘역과 신도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 산 86-6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신대광 |
문화재 지정 일시 | 1995년 8월 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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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한응인묘역 경기도 기념물 재지정 |
성격 | 묘역 |
건립시기/일시 | 조선 후기 |
관련인물 | 한응인 |
높이 | 79㎝[비신]|143㎝[가첨석]|145㎝[기대] |
소재지 주소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 산 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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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자 | 청주한씨 충정공파 문중 |
문화재 지정번호 | 경기도 기념물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한응인의 묘역.
한응인(韓應寅)[1554~1614]은 조선 선조(宣祖)[1552~1608] 때 문신으로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졸재(白拙齋),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부사직 한경남(韓敬男)의 아들로 태어났다. 1576년(선조 9) 사마시를 거쳐 이듬해 알성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으로 뽑혔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1546~1589]의 모반 사건을 적발하여 그 공으로 호조참의에 오르고 승지를 지냈다.
1590년 평난공신(平難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임진왜란 때 요동에 건너가 원병의 급속한 출병을 요구하였고, 이여송(李如松)[?~1598]이 원군을 이끌고 오자 접반관(接伴官)으로 이여송을 맞이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조판서·호조판서·병조판서를 거쳐 1607년(선조 40) 우의정에 올랐다.
한응인묘역은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을 지나는 국도 42호선 수인산업도로에서 수원 방향 좌측으로 마을 안쪽에 있다.
한응인묘역은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으나 정확한 건립 연도는 알 수 없고, 신도비는 1642년(인조 20) 건립되었다. 1994년 묘역을 새로 정비하면서 묘비의 기대(基臺) 부분과 상석·향로석·계체석 등의 석물을 교체·설치하였다.
묘의 봉분은 단분으로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와의 합장묘이며, 장대석을 이용하여 2단으로 방형의 호석(護石)을 둘렀다. 봉분 앞에는 묘비·혼유석·상석·향로석이 가까이 모여 있고, 묘역 앞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1쌍씩 배열되어 있다.
신도비(神道碑)는 묘역의 50m 우측 전방에 위치하는데, 우진각지붕형 지붕돌[가첨석(加檐石)]·비신(碑身)·기대(基臺)로 구성되어 있다. 비신의 높이는 79㎝, 너비는 23㎝, 두께는 179㎝이고, 가첨석의 높이는 143㎝, 너비는 95㎝, 두께는 58㎝이며, 기대의 높이는 145㎝, 너비는 100㎝, 두께는 59㎝이다. 신도비의 양식적 특징은 가첨석의 하단부 건물에 기둥 석부와 지붕 사이에 있는 공포(拱包)의 형상을 조각해 놓음으로써 압박감을 덜어 주어 안정감 있게 보이도록 한 것이다.
신도비의 비문은 김류(金鎏)가 짓고 한인급(韓仁及)이 글씨를 썼으며, 김광현(金光炫)이 전액(篆額)을 썼다.
1995년 8월 7일 경기도 기념물 제157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기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2009년 현재 소유자 및 관리자는 청주한씨 충정공파 문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