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24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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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瑞氣-映湖樓懸板 |
영어의미역 | Yeonghoru Palace Hanging Board Which Shined Auspicious Signs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정하동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조정현 |
경상북도 안동시 정하동에서 영호루 현판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공민왕(恭愍王, 1330~1374)은 고려 제31대 왕으로 이름은 전(顓), 호는 이재(怡齋)·익당(益當)이다. 왕위에 오른 뒤 중국 원나라를 배척하고 친원파인 기씨(奇氏) 일족을 제거하였다.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는 등 국위를 떨쳤으나 나중에는 정치를 잘못하여 최만생(崔萬生)과 홍윤(洪倫)에게 살해되었다.
1999년 경상북도 안동시 옥정동에서 주민 권재영(남, 66)이 구연한 것을 채록하여 1999년 안동시사편찬위원회에서 출간한 『안동시사』에 수록하였다.
영호루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라고 알려져 있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서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 머무를 때 친히 글씨를 쓴 것이다. 공민왕의 친필이니 만큼 사람들은 현판 글씨의 필치가 참으로 뛰어나다고 입을 모았다. 옛날부터 영호루가 수차례 수마에 유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판만은 지금까지 보존이 잘되고 있다. 그 이유는 영호루 현판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래 영호루에는 여러 개의 현판이 있었다. 당대 유명한 사람들이 영호루를 찾았을 때 저마다 글을 지어 붙여 두어서 그렇게 현판이 많아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런 현판들은 홍수만 나면 떠내려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언젠가 영호루 현판도 홍수에 떠내려갔었는데, 상주 땅 어딘가에서 서기가 비쳤다고 한다. 그래서 가 보니 그게 바로 영호루 현판이었다. 영호루 현판이 아직도 영호루에 끄떡없이 잘 걸려 있게 된 연유이다.
「서기가 비친 영호루 현판」의 주요 모티프는 ‘공민왕이 쓴 영호루 현판’과 ‘영호루 현판의 영험’이다. 위대한 인물의 손길이 닿거나 그와 관련되는 것은 그것이 비록 사물일지라도 신이함을 갖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제2차 홍건적의 난 때 경상북도 안동으로 몽진한 공민왕과 안동 지역과의 연관성을 지속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안동 지역에는 공민왕의 몽진에 관련한 많은 설화가 전하는데 「공민왕의 싸움터 오마대」·「공주를 태워서 시작된 놋다리밟기」·「용상동 여랑당」 등이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