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2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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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礩 |
영어음역 | Gwon Jil |
이칭/별칭 | 사안(士安),사락정(四樂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주부 |
조선 전기 안동으로 유배된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안(士安). 아버지는 예조참판 권주(權柱), 어머니는 지중추부사 이칙(李則)의 딸이다. 사위가 퇴계(退溪) 이황(李滉)이다.
권질은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의 실정을 폭로한 언문투서 사건이 일어나자 앞서 갑자사화에 화를 당한 자손들의 짓이라 하여 신국(訊鞫: 심문과 국문)을 당한 뒤 거제도로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 이후 풀려났다. 조정에서 갑자사화에 화를 입은 사람들을 신원하고 자손을 등용할 때 아버지 권주가 신원되고, 권질 자신은 음보로 현릉참봉(顯陵參奉)에 제수되었다. 그 뒤 다시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 순릉참봉(順陵參奉), 후릉참봉(厚陵參奉) 등을 역임하였다.
1517년(중종 12) 광흥창봉사(廣興倉奉事)에 승진되었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사림파가 훈구 세력에 의해 축출당한 뒤 1521년 사림파와 친밀했던 안처겸(安處謙)이 훈구대신을 해치려 하였다는 무옥(誣獄)이 일어나서 남은 사림파가 다시 쫓겨날 때 아우 권전(權磌)은 장살되고 권질은 예안현(禮安縣: 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으로 유배되었다. 1538년 유배에서 풀려났으며 이듬해 고신(告身)을 되돌려 받았으나 1545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